입력
수정
유럽의 잃어버린 경제 성장 엔진 혁신 인프라 부진에 기업 성장 둔화 글로벌 기술 기업 부재도 경제 발목

미국이 경제 성장 면에서 유럽을 크게 앞지르는 가운데, 유럽이 국제 기술 경쟁에서 뒤처진다는 분석이 나왔다. 소프트웨어부터 인공지능(AI)까지 차세대 기술 기업 육성에 실패하면서 경제 성장마저 발목을 잡고 있다는 지적이다.
미국과 모든 지표서 격차 확대
3일(이하 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유럽이 기술 경쟁에서 뒤처지는 현실을 조명했다. 우선 유럽은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 비상장 기업) 육성부터 미국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 실제 최신 자료를 보면(2025년 4월 기준) 유니콘 기업 수는 미국이 702개(총 기업가치 약 3조2,000억 달러)로 압도적인 반면, 유럽 전체(영국 104개, 프랑스 34개, 독일 29개 등 포함)는 600여 개에 이르지만 총 기업가치는 3,300억~4,000억 달러 수준으로 미국에 크게 못 미친다.
설상가상으로 유럽에서 탄생한 유니콘조차 기업공개(IPO)를 통해 각 산업의 주도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 슬론 경영대학원의 앤드루 매카피 교수가 분석한 자료를 보면, 창업 50년 미만이면서 기업가치 100억 달러(약 13조7,000억원) 이상인 상장 기업 수는 미국이 241개(총 가치 29조6,000억 달러·약 4경원)인 데 반해, 유럽연합(EU)은 고작 14개(총 가치 4,300억 달러·약 590조원)에 불과했다.
투자·연구개발 '빨간불'
유럽 기업이 부진한 배경에는 고질적인 투자 부족이 자리한다. 유럽의 벤처캐피털(VC) 규모는 미국 대비 20% 수준에 그치며, 2014년부터 2024년까지 10년간 유럽 기술 분야에 총 4,250억 달러(약 583조원)가 투자됐으나 이는 여전히 미국과 큰 격차를 보인다. 유럽은 미국에 비해 벤처 투자 규모가 현저히 작을 뿐 아니라, 자본 시장 자체도 덜 발달했다. 유럽 가계 자산의 31%가 현금과 예금에 묶여있는 반면, 미국은 이 비율이 12%에 불과해 비교적 주식·채권 같은 성장 자본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다. 이 때문에 유럽 신생기업들은 성장 단계에서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어 미국 등지로 옮겨가는 사례가 잦다.
유럽은 연구개발(R&D) 투자에서도 뒤처지고 있다. 미국은 2007년 4,618억 달러에서 2023년 8,231억 달러(약 1,130조원)로 80% 이상 늘어난 반면, 유럽은 같은 기간 50% 증가에 그쳤다. 투자에서 민간 자본 유입이 낮고, 정부 지원은 생산성 제고보다 복지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럽 정부의 한 사람 기준 R&D 투자는 미국과 비슷하지만 민간 자본 유입이 현저히 적다. 2007년부터 2020년까지 R&D 투자액 추이를 보면 미국이 최상위를 유지하는 가운데 중국이 빠르게 EU를 추월하며 격차를 벌렸다.
이 같은 투자 부진의 이면에는 보수 성향 투자와 위험 회피 문화가 있다. 유럽 투자자와 기업가들은 미국에 비해 다른 이들보다 위험 감수를 꺼리며, 실패에 대한 사회 부담도 크다. '성장 우선, 수익은 나중' 전략으로 시장 선점을 노리는 미국 기업들과 달리, 유럽은 초기부터 수익과 안정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해 대담한 혁신이 나오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경제 성장까지 '경고등'
과도한 규제도 성장 발목을 잡고 있다. EU의 개인정보보호법(GDPR), 디지털시장법(DMA), 디지털서비스법(DSA) 같은 강력한 규제는 미국 대기업에는 대응력을 키워주는 반면, 유럽 안 신생기업과 성장기업에는 비용 부담과 진입장벽을 높여 혁신을 막는 결과를 낳고 있다. 혁신 인프라 부족도 미흡한 상황이다. 미국 실리콘밸리 같은 대규모 혁신 중심지가 없고, 성공한 창업가와 투자자 사이 관계망이 다른 곳에 비해 약해 '연쇄 창업'이나 대형 엑시트(투자금 회수) 사례도 미국, 이스라엘, 중국에 비해 드물다.
이렇다 보니 유럽의 우수 인재와 유망 신생기업이 더 나은 자금 지원, 사업 환경, 성장 기회를 찾아 미국 등으로 떠나는 '인재 유출' 현상도 심각하다. 스카이프(Skype), 딥마인드(DeepMind)처럼 유럽에서 출발했지만 끝내 미국 대기업에 인수된 사례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파산을 택하는 기업도 적지 않다. 독일의 에어택시 스타트업 릴리움(Lilium)는 지난해 10월 파산을 신청했다. 파산 절차가 진행되면서 나스닥 상장 폐지가 됐고, 같은 해 12월에는 직원 약 1,000명을 해고했다. 릴리움과 함께 에어택시 부문의 쌍두마차였던 볼로콥터(Volocopter)도 지난해 12월 파산 절차에 돌입했다. 이미 볼로콥터는 이미 지난해 11월부터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던 터라 예견된 절차였지만, 혁신 분야의 거대 스타트업인 릴리움과 볼로콥터의 연이은 파산 절차 돌입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전문가들은 유럽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 미래 기술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혁신 생태계 강화, 과감한 규제 완화, 투자 확대, 단일 시장 활성화, 핵심 인재 유치와 보유를 위한 범유럽 차원의 전략 대응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은다. 명목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EU 경제 규모는 이미 미국보다 3분의 1가량 작으며, 지난 수년간 성장률 역시 미국의 3분의 1 수준에 머물렀다는 점은 위기감을 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