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도에 100% 관세 매기자" 美 제안 받은 EU, 확답 내놓기 어려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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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EU, 인도·중국 무역 제재 협력해 달라" EU, 올해 초 인도와 '연내 FTA 협상 타결' 약속 강력한 제재가 오히려 '중국-러시아-인도' 연대 강화할 위험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유럽연합(EU)에 중국·인도산 수입품에 최고 100% 관세를 부과하라는 요구를 내놨다. 중국과 인도의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막기 위해 손을 잡고 무역 제재를 강화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다만 시장에서는 EU와 인도의 무역 관계가 눈에 띄게 개선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EU가 이 같은 미국의 제안에 선뜻 응하기는 어려우리라는 전망에 힘이 실린다.
트럼프, EU에 협력 제안
9일(이하 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 트럼프 대통령이 EU 측에 인도와 중국산 제품에 대한 최대 100%의 관세 부과를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그는 지난 화요일 워싱턴DC에서 열린 미·EU 고위 당국자 회의에 전화로 참여해 이 같은 이례적 요구를 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중재를 시도해 왔으나,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공세가 지속되자 최근 들어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고 있다. 앞서 지난달 27일에는 러시아산 석유를 대량 수입하는 인도에 총 50%의 관세를 부과하기도 했다.
미국이 EU에 이처럼 강경 대응을 요청하고 나선 것은 EU와의 협력 없이 단독으로 이들 국가에 제재를 가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 백악관 관계자는 "대통령의 생각은 명확하다"며 "모두가 극적인 관세를 부과하고, 중국이 러시아산 석유 구매를 중단할 때까지 이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러한 모든 조치에는 당연히 비용이 많이 든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실현하려면 EU를 비롯해 모든 파트너가 함께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강조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압박하고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EU의 전략적 연대가 필수적이라는 시각이다.
EU-인도 FTA 논의 한창
다만 EU가 이 같은 미국의 제안을 선뜻 승낙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현재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필두로 EU와 인도의 무역 관계가 눈에 띄게 개선된 상태기 때문이다. 인도와 EU의 FTA 협상은 당초 2007년 6월 시작됐으나, 2014년 4월 시장 접근 수준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해 한 차례 중단됐다. 관련 논의가 재개된 것은 8년가량이 지난 2022년 6월이었다. 이후 지난 2월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와 우르술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오랫동안 정체 상태였던 FTA 협상을 올해 말까지 타결하기로 합의했다.
현재 양측은 EU의 관세 인하 요구와 인도의 수출품 경쟁력 제고 방안을 비롯해 총 23개 협상 분야에 대한 논의를 지속하고 있다. 성공적으로 협상이 마무리될 경우, 양국의 무역 시장에는 상당한 수준의 변화가 닥쳐올 것으로 전망된다. 인도와 EU간 무역 시장의 규모가 상당히 크기 때문이다. 이들 국가의 2023∼2024 회계연도(2023년 4월 개시) 무역액은 1,374억1,000만 달러(약 190조8,000억원)에 달했다.
시장에서는 EU 측이 인도와의 FTA 체결을 서두를 수밖에 없다는 평도 제기된다. EU와 구조적으로 경쟁 관계에 있는 영국이 한 발 먼저 인도와 FTA를 맺은 탓이다. 앞서 지난 7월 조너선 레이놀즈 영국 산업통상부 장관과 피유시 고얄 인도 상공부 장관은 런던에서 양국 간 무역 협정에 공식 서명한 바 있다. 양국은 해당 협정을 통해 자동차, 위스키, 섬유 등 주요 품목의 관세를 서로 인하하고, 양국 기업의 시장 접근성을 확대하기로 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유럽과 인도의 FTA 체결이 무산될 경우, 인도의 인력과 자본이 줄줄이 영국으로 유입되며 EU의 시장 입지가 좁아질 가능성이 크다.

중국-인도의 협력 전선
EU가 미국의 손을 잡고 무역 제재에 나설 시 오히려 중국-러시아-인도 3국의 협력 관계가 한층 공고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특히 중국과 인도는 트럼프 대통령의 고율 관세와 외교적 압박을 발판 삼아 우호 관계를 구축한 상태다. 양국은 최근 2020년 국경 충돌 당시의 악감정을 뒤로 하고 국경 분쟁 해결 노력을 배가하기로 합의했다. 중국은 비료와 희토류 공급을 약속하며 무역 장벽 완화 조치에 나섰고, 인도는 오랜 기간 금지해 온 중국 관광객 비자 발급을 재개했다. 직항편 운항도 곧 다시 시작될 예정이다.
경제적 이해도 양국의 관계 회복을 뒷받침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의 보호무역주의 강화로 수출길이 막힌 중국은 인도를 신흥 시장으로 주목하는 중이다. 인도 역시 제조업 비중을 국내총생산(GDP)의 25%까지 확대한다는 모디 내각의 목표 달성을 위해 중국의 기술·투자에 의지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인도 싱크탱크 옵서버리서치재단의 안타라 고살 싱 연구원은 “신뢰가 구축된다면 양국의 경제적 가능성은 엄청나다”며 “트럼프야말로 양국이 관계를 재검토하게 만드는 좋은 자극제”라고 분석했다.
인도와 중국의 관계 정상화 흐름이 가시화한 가운데, 양국 정상 역시 국제 사회에 분명한 '화해'의 신호를 전달하고 나섰다. 지난달 31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상하이협력기구(SCO) 개막 이후 모디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졌다. 시 주석이 모디 총리와 마주 앉은 것은 7년 만의 일이다. 시 주석은 모디 총리를 만나 “용과 코끼리의 협력을 실현하는 것이 양국의 정확한 선택”이라며 갈등 해소를 희망했고, 모디 총리 역시 “인도와 중국은 적대국이 아닌 동반자로, 의견 차이보다 공감대가 훨씬 크다”고 화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