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손 들어준 美 법원 “보조금 중단은 위헌”, 트럼프 ‘명문대 길들이기’ 정책 제동
입력
수정
행정부, 반유대주의 방치 이유로 연방 지원금 동결 법원, “‘표현의 자유’ 침해, 연구비 취소는 위법” 판결 하버드, 이번 판결로 향후 협상서 유리한 고지

미국 연방법원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진보 좌파 소굴’로 지목한 하버드대학교를 압박하기 위해 연방 연구기금을 동결한 조처를 위법이라고 판결했다. 행정부의 ‘반(反)유대주의’ 주장은 허울뿐인 구실로, 표현의 자유와 학문의 자율성을 침해한 명백한 위헌적 조처라는 것이다. 이는 연방 자금을 무기로 미국 명문대들을 길들이려던 트럼프 행정부 정책에 사법부가 제동을 건 첫 사례로, 향후 행정부와 대학 간 갈등의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반유대주의 구실에 불과”, 행정부 조치 전면 무효화
3일(이하 현지시각)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미국 매사추세츠 연방지방법원 앨리슨 버로스(Allison Burroughs) 판사는 “트럼프 행정부가 하버드대 연구 보조금 22억 달러(약 3조원)를 불법적으로 동결했다”며 자금 동결 조처를 즉각 해제하라고 판결했다. 버로스 판사는 “행정부가 하버드를 상대로 추가적인 자금 지원을 동결하거나 거부해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았다.
버로스 판사는 84페이지 분량 판결문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내세운 반유대주의가 명분에 불과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행정부가 반유대주의를 이 나라 최고 대학들에 대한 이념적 동기가 있는 표적 공격을 위한 ‘연막(smokescreen)’으로 사용했다는 결론 외에 다른 것을 내리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어 “이들의 행동은 수십 년간 진행된 연구와 그 혜택을 볼 모든 사람 복지를 위태롭게 했으며, 헌법과 연방법이 보호하는 권리를 무시했음을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미 수정헌법 제1조는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으며, 민권법 제6장은 인종이나 피부색, 출신 국가 등을 근거로 차별할 수 없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울러 버로스 판사는 “트럼프 행정부는 당시 보낸 서한에서 10개 조건을 충족해야 지원금을 유지한다고 명시했는데, 그 중 반유대주의와 관련된 것은 단 1개뿐이었고 나머지 6개는 하버드가 누구를 가르치고, 누구를 입학시키고, 무엇을 가르칠 수 있는지 같은 이념적·교육적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DEI 폐지·학생 이념 검증 등 10개 조건 요구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이후 고등교육을 재편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며, 자신과 지지자들이 '진보적'이라 비판하는 캠퍼스 내 다양성 프로그램 등을 공격하는 한편, 반유대주의 문제 근절을 시도해 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인지도 높으며 부유한 하버드는 싸움 대상으로 적격이었다. 하버드에 본격적인 압박이 시작된 것은 지난해 10월로,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한 이후 하버드 캠퍼스 내에서 친(親)팔레스타인 시위가 격화하자, 이를 반유대주의로 규정하고 강도 높은 압박을 실행했다.
지난 4월에는 하버드가 교내 반유대주의를 해결하는 데 충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수백 건에 달하는 연방 연구 보조금 지급을 중단했다. 당시 트럼프 행정부는 자금 지원 재개 조건으로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 정책 폐지 △교직원 채용 및 학생 입학 시 이념적 편향성 심사 △반유대주의를 조장하는 학과·프로그램 조사 등 사실상 대학 운영 전반에 개입하려는 10가지 요구사항을 내걸었다. DEI는 그동안 소수 인종과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기 위해 미국 대학들이 폭넓게 채택해 온 정책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역차별을 조장하는 급진 좌파 정책’으로 비판하고 있다.
이에 당시 하버드는 트럼프 행정부의 요구를 강하게 거부했다. 앨런 가버(Alan Garber) 하버드대 총장은 “어떤 정부도 사립대학이 무엇을 가르치고, 누구를 입학시키고 고용할지 지시해서는 안 된다”며 정면으로 맞섰다. 그러자 행정부는 불과 몇 시간 만에 자금 동결을 실행에 옮겼고, 하버드는 그로부터 일주일 뒤 “수정헌법 제1조가 보장하는 표현과 학문의 자유를 침해하는 명백한 보복 조처”라며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이와 함께 트럼프 행정부의 요구를 따르지 않겠다는 공개 선언도 했다.

대학소유 특허권 회수 압박 및 유학생 등록 권한 박탈도
하지만 이후로도 트럼프 행정부의 압박 조처 계속됐다. 지난 5월에는 하버드의 외국인 유학생 등록 권한을 박탈했는데, 당시 미 국토안보부는 성명에서 대학이 외국인 유학생을 받아들이고, 이들의 높은 등록금으로 수십억 달러 규모의 기금을 늘리는 것은 권리가 아니라 특권이라고 주장했다. 같은 시기 미 재무부는 미 국세청(IRS)에 하버드의 면세 지위를 박탈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지난달 들어서는 미 상무부가 하버드가 보유하고 있는 특허권 회수 가능성을 경고했다. 당시 하워드 러트닉 상무부 장관은 가버 총장에게 서한을 보내, 하버드 보유 특허에 대한 심층 조사를 실시할 예정이라고 통보했다. 러트닉 장관은 “하버드가 연방정부 지원 연구 프로그램 및 관련 특허와 관련해 법·규제·계약상 요구사항을 위반했다고 본다”며 “미국 납세자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압박이 날로 거세지자 하버드는 법원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 굴복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자금 지원이 끊긴 지 4개월 만인 지난 8월 하버드는 DEI 관련 부서 명칭을 ‘커뮤니티 및 캠퍼스 생활 사무소’로 바꿨고, 기숙사 내 성소수자·저소득층 학생 지원 감독관직도 폐지했다. 이어 팔레스타인 대학과 교류를 중단하는 등 행정부 요구에 부합하는 정책 변경을 잇달아 내놨다. 이뿐만 아니라 하버드는 연방정부 자금 지원 재개 조건으로 5억 달러(약 6,900억원)의 합의금을 내는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다.
다만 하버드는 물밑에서 합의를 추진하면서도 소송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투트랙 전략’을 구사했다. 그 결과 연방법원에서 승소하며 앞으로 이어질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됐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번 연방법원 판결은 엘리트 고등 교육을 무력으로 재편하려는 트럼프 행정부 캠페인에 대한 명백한 질책”이라고 평가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번 판결에 즉각 반발했다. 미 교육부는 성명을 통해 “결국 대법원에서 뒤집힌 하버드의 불법적인 인종 기반 입학 관행에 찬성 판결을 내렸던, 똑같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지명 판사가 이번에도 트럼프 행정부 노력에 반하는 판결을 내렸다”며 항소 가능성을 내비쳤다. 이번 판결로 하버드는 당장 3조원에 달하는 연구 기금을 지켰지만, 트럼프 행정부와 갈등은 계속될 수 있다는 의미다. 현재 하버드는 트럼프 행정부가 유학생 등록을 금지한 것을 놓고도 소송을 진행 중이다. 지난 6월 매사추세츠 지방법원은 해당 조치에 대한 효력을 중단했으며, 현재 본안 소송은 계속 진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