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제조업 근간 뒤흔들 '노란봉투법' 강행, ‘보완 입법’ 요구 목소리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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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질적 지배력 구체적 기준 없어 구조조정·해외투자까지 쟁의 대상 경제 6단체 “보완 입법 서둘러야”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노조의 손해배상 책임을 제한하고, 원청과 하청 간 연대 책임 범위를 좁히는 내용이 골자다. 노동 시장 격차 해소에 기여하고 노사 분쟁도 원만히 해결하겠다는 취지지만,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경영계에서는 향후 법적 분쟁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사용자 범위의 무분별한 확대와 손해배상 제한으로 원·하청 생태계를 붕괴시킬 수 있는 데다, 사측이 손해 비용을 고스란히 떠안을 경우 기업의 경영활동 위축은 물론 경쟁력 저하까지 우려된다는 지적이다. 경영상 결정 대부분이 쟁의 대상이 된다면 한국 경제의 노조 리스크를 키워 궁극적으로는 해외투자와 국내 기업의 엑소더스로 이어질 공산도 있다.
핵심은 ‘하청 노동자 교섭’과 ‘손배 제한’
25일 정치계에 따르면 국회는 전날 오전 국민의힘의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을 통한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가 끝난 뒤 노란봉투법을 본회의 표결에 부쳐, 재석의원 186명 중 찬성 183표, 반대 3표로 통과시켰다. 23일 노란봉투법이 본회의에 상정된 직후인 아침 9시 9분께부터 24시간 2분간 필리버스터가 진행됐으며, 국민의힘 의원들은 필리버스터 종결 직후 법안 처리에 항의해 표결에 불참했다.
노란봉투법은 쌍용자동차 파업 등에서 발생한 노동자 손해배상·가압류 문제를 계기로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더불어민주당의 전신)이 처음 국회에 발의했으나, 당시와 이후에도 보수 정치권과 재계의 반발로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장기간 계류와 폐기를 반복했다. 윤석열 정부 들어서는 2023년 11월과 2024년 8월 2차례 국회 본회의에 올라갔지만, 윤석열 전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로 모두 폐기됐다.
이번 노란봉투법의 주요 개정 내용은 크게 세 가지다. 우선 근로자를 고용하고 사업 운영에 대한 책임과 권한을 지닌 ‘사용자성’의 범위를 확대했다. 근로조건을 실질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원청은 법적으로 ‘사용자’가 되며, 교섭 의무를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원청과 직접 근로계약을 맺지 않은 하청 기업 소속 근로자도 교섭 대상이 될 수 있게 한다.
‘노동쟁의’ 대상도 넓혔다. 사업 경영상의 결정 중에서도 근로조건 변경을 수반하는 경우에는 노동쟁의 대상에 포함되도록 했다. 구조조정, 공장 이전, 인수합병(M&A) 같은 기업 전략적 의사결정조차 파업 대상이 된다는 의미다. 또 쟁의행위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손해에 대해 사용자가 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범위를 제한했다. 정부는 이 같은 조치가 노동시장 격차 해소에 기여하고 노사 분쟁도 원만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노란봉투법은 사실상 기업의 손해배상 청구 역사 속에서 탄생했다. 1990년 당시 노동부 장관이었던 최병렬 전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 대표는 “노동운동의 준법질서 확립 대책”으로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를 적극 활용하라”는 지침을 발표했고, 그해 법원은 쟁의행위에 손해배상 책임을 처음 인정한 후 다수 파업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불법’ 딱지를 붙이기 일쑤였다. 이에 기업들 사이에선 파업 노동자가 평생 벌 수 없는 막대한 액수를 손해로 청구한 뒤 법원 판단을 기다리거나 노조가 무너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편리한 방법으로 자리 잡았다. 2009년부터 2020년까지 국가와 기업 등이 노조에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만 151건, 청구액은 2,752억7,000만원에 달한다.

“경영상 결정도 파업 사유” 경영계, 경쟁력 위축 우려
다만 전문가들은 노동자 권익 보호라는 대의명분에는 동의하면서도, 개정안이 헌법과 민법 등 다른 법률과 충돌할 소지가 다분하고, 사회적 혼란과 불법 파업을 조장할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경영계에서도 노란봉투법 본회의 통과에 일제히 유감이라는 뜻을 나타냈다. 경영계는 △노조의 무차별 경영 간섭 △잦은 노사 분쟁 △원청 노조와 하청 노조 간 갈등 △기업들의 해외 이전 △신규 채용 위축 △한국 투자매력도 저하 등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지금 법안대로라면 기업들은 하도급 축소, 자동화 확대, 해외 이전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완성차·부품업계를 비롯한 제조 현장에서는 향후 파업과 손해배상 청구를 둘러싼 불확실성이 확대돼 공급망 전반에 충격을 줄 수 있다는 지적이 거세다. 부품업체 한 군데만 멈춰도 완성차 공장은 줄줄이 서는 구조기 때문이다. 조선 역시 수십 개 협력사가 맞물려 선박을 건조하는 만큼, 하청 한 곳의 파업이 곧바로 수조원대 수주 지연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런 경영계의 공포는 단순한 가정이 아니다. 2023년 미국에서 GM·포드·스텔란티스 등 ‘빅3’ 노조가 40여 일간 동시 파업에 돌입했을 당시, 피해액은 70억 달러(약 9조원)에 달했다. GM은 3분기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40% 이상 급감했고 글로벌 시장 점유율도 추락했다.
그런데 노동계에서는 노란봉투법 시행까지 수개월이 남았음에도 벌써부터 원청 기업을 향한 하청 노조들의 ‘투쟁 선포’가 잇따르고 있다. 현재 현대제철, 네이버 등 하청 노조는 “진짜 사장이 나오라”면서 원청 기업에 직접 교섭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동차, 조선 등 하청업체 의존도가 높은 대기업은 자칫하단 수십∼수백 개 업체와 일일이 교섭하게 될 거란 우려가 현실로 닥칠 수 있는 상황이다.
이렇다 보니 노란봉투법이 결국 기업 경영활동 위축은 물론 국내 사업경쟁력 저하를 야기할 것이란 우려가 적지 않다. 기업들은 노동쟁의 개념 확대로 투자 결정, 사업장 이전 등 경영상 판단까지 대상에 포함돼 경영권의 본질적 사항까지 침해될 것이라며 큰 우려를 표했다. 한국GM 철수설도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GM의 한국 철수설은 과거에도 여러 차례 제기됐었지만, 이번에는 악화된 경영 상황까지 겹쳐 진짜 철수할 수 있다는 전망에 무게가 실린다.
외국 투자기업들과 한국 제조기업들의 엑소더스가 발생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글로벌 기업들은 기업 경영권 안정성을 핵심 투자조건으로 보고 있는데 노란봉투법이 이를 훼손해 한국 경제의 투자 매력도를 낮출 것이라는 우려다. 또한 기업들이 미국발 관세전쟁에 대응해 해외에 공장을 짓거나, 산업 구조조정을 위해 석유화학 시설을 감축할 때에도 노조 파업을 걱정하게 됐다.
“보안 입법 없으면 ‘탈한국’ 기업 급증할 것”
이에 경영계에서는 보완 입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개정안에는 ‘실질적 지배력’이 어디까지인지 불분명한 만큼, 후속 입법을 통해 사용자 범위를 명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장에는 하청 업체를 많게는 수백 개씩 보유한 대기업도 있어, 지침 하나로 이 복잡한 관계를 정리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지적이다.
실제 현대차·기아만 해도 1·2·3차 협력사를 합치면 5,000개가 넘고, 조선 기업도 공정에 관여하는 1차 협력사만 업체마다 1,000여 곳에 달한다. A대기업이 5차 협력사까지 있다면, 교섭을 5차 협력사까지 전부 해야 하는 건지, 3차 협력사까지만 하면 되는지도 불분명하다. 현재 법안으로서는 원청과 직접 계약 관계가 없는 하청 업체 노동자도 원청에 교섭을 요청할 수 있어, 경영계는 “기업에 사실상 무한 책임을 지운다”고 반발하고 있다. 원청이 하청 노조와 교섭 테이블에 앉게 되면 결국 하청 업체가 피해를 볼 가능성도 크다. 원청이 노조가 없는 협력사와 계약을 새로 맺거나, 애초 협력사를 선정할 때 거래 중단 가능성을 예고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어서다.
경제 6단체(한국경영자총협회·대한상공회의소·한국경제인협회·한국무역협회·중소기업중앙회·한국중견기업연합회)는 “노동조합법상 사용자가 누구인지, 노동쟁의 대상이 되는 사업경영상 결정이 어디까지 해당하는지도 불분명해 향후 노사 간에 법적 분쟁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며 “국회는 산업 현장 혼란이 최소화되도록 보완 입법을 통해 사용자 범위와 노동쟁의 개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파업 노동자에 대한 기업의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한 것과 관련해 '배상액 상한'을 시행령에서 별도로 정하고, 급여를 압류하지 못하도록 하는 대안을 제시했다. 불법파업에 대한 손해배상이 근로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경영계가 일부 양보한 모양새다.
고용노동부는 6개월 시행 유예를 두고 태스크포스(TF)를 꾸려 지침을 마련하겠다는 입장이다. 노동부 관계자는 "노동위원회와 법원에서 제시되는 판례와 판단 기준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전문가들의 심도 있는 논의를 거쳐 원청의 사용자성 판단기준, 교섭 절차, 노동쟁의 범위 등에 대한 구체적 지침·매뉴얼을 정교하게 마련해 나갈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매뉴얼도 법적 구속력이 없어 결국 법원 판단에 맡겨야 한다. 입법부와 행정부가 책임을 사법부에 떠넘겼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대법원 최종 판결까지 수년이 걸리고 사안마다 판단이 달라질 수 있어, 상당 기간 산업 현장의 혼란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