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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선인 ‘자사주 소각 의무’ 공약 경영권 위기감에 스스로 상장폐지 계열사나 우호 세력에 넘기기도

이재명 정권 출범이 확정된 가운데 새 정부에서는 자사주 비중이 높은 상장사의 ‘전략적 상장폐지’가 늘어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이재명 당선인의 자본시장 공약에 ‘자사주 소각 의무화’가 담겨 있어서다. 자사주 소각 의무화는 지난 2023년 금융당국이 추진했다가 재계의 강력한 반발로 무산됐었다. 다만 인적분할 시 자사주 의결권 부활을 막기 위해 자사주 신주배정을 금지하면서 이른바 '자사주의 마법'은 쓸 수 없게 된 상태다.
자사주 규제 강화 속 지배력 약화 우려↑
4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이 당선인은 지난달 28일 한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탈법 수단으로 회사의 돈, 즉 주주 돈으로 자사주를 산 다음 백기사에게 파는 등 소수 지배주주의 사적 이익을 위해 (자사주가) 쓰이는 경우가 있다”며 “(이러한 점을 고려해) 가능하면 빨리 제도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이후 증권가에서는 자사주 비중이 높은 상장사들을 중심으로 전략적 상장폐지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자사주를 전량 소각할 경우 최대주주의 지분율이 급감해 경영권 방어가 어려워지고, 행동주의 펀드의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반면 자사주 비중이 높다는 것은 곧 회사가 적은 지분만으로 상장폐지를 추진하기 수월한 구조라는 의미기도 하다. 자사주 비중이 높은 기업은 향후 자사주 소각 시 경영권 악화가 불가피하다. 작년 말부터 ‘자기주식 보고서’ 공시가 의무화되는 등 자본시장 규제가 강화됐고, 최근 몇 년간 주주 행동주의 활동이 활발해진 영향도 있다.
자진 상폐 기업 늘어날 듯
전략적 상장폐지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통신 솔루션 기업 텔코웨어가 꼽힌다. 최근 텔코웨어는 보유 중인 자사주 전량 소각 시 최대주주인 금한태 대표의 지분율 급감에 따른 경영권 불안을 우려해 공개매수를 통한 상장폐지를 추진 중이다. 공개매수가 계획대로 종료된다면 금 대표의 지분은 특수관계인까지 포함해 55.89%가 된다. 자사주 비율이 44.11%에 달하는 텔코웨어는 금 대표 측의 56% 지분만으로도 상장폐지될 수 있다. 현행 상장폐지 규정상 자사주를 제외한 지분 기준으로 코스피 상장사는 95%, 코스닥은 90% 이상 보유하면 되기 때문이다.
다른 기업들도 자사주를 빠르게 처분하거나 자발적 상장폐지를 추진하는 등 대응책을 고심하고 있다. 사조대림은 지난달 28일 보유 자사주(4.95%)의 약 절반을 계열사에 넘기기로 했다. 사조대림은 “기업 운영자금 확보와 재무구조 개선을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금투업계 관계자들은 “자사주를 계열사에 매각하면 소각을 요구받지 않기 때문일 것”이라고 해석했다.
일각에서는 행동주의 펀드를 중심으로 배당 확대, 자사주 소각 요구가 제기될 가능성이 큰 상장사 명단도 거론되고 있다. LS증권은 지난해 배당성향이 최근 3년 평균 대비 낮은 상장사 가운데 순현금 상태면서 주가순자산비율(PBR)이 1배 미만인 곳을 대상으로 배당 확대 요구가 확산될 것으로 봤다. 대표적인 기업으로 현대모비스(PBR 0.46배),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0.42배), 농심(0.81배), 아모레퍼시픽홀딩스(0.56배) 등이 꼽힌다. 자사주 비중이 높으면서 PBR이 낮은 삼성물산(0.60배), LG생활건강(0.92배), 대한제강(0.36배) 등에 대한 자사주 소각 요구 목소리도 커질 것으로 전망했다.

상법개정안 통과 조짐에 업계 긴장
한편 이 당선인의 공약 중 상법개정안 통과도 업계를 긴장 상태로 몰아 넣고 있다. 민주당이 당론으로 추진했던 상법개정안은 야당 주도로 국회의 문턱은 넘었지만 한덕수 전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의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로 무산됐다. 핵심 내용은 기업의 이사가 충실의 의무를 가지는 대상을 기존 '회사'에서 '회사 및 주주'로 넓혀 소액주주의 권리를 폭넓게 보장하는 것이다.
이에 재계에서는 기업들의 경영 활동 위축 우려가 높다. 소송 남발로 기업의 의사결정이 제한되거나 늘어질 수 있다고 판단해서다. 특히 오너 일가와 소액주주들의 이해충돌이 자주 발생하는 대기업이 상법개정안에 대한 부담이 더욱 크다. 대기업의 경우 총수 일가의 승계 혹은 지배력 유지를 위한 유상증자 및 기업분할 등이 소액주주들과 갈등을 빚는 경우가 있다. 오너 일가의 지분율이 낮은 기업일수록 이 같은 경향이 강하다. 기업들은 경영상의 판단이고 장기적 성장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주가에는 악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기업분할 및 상장을 통해 총수 일가만 지분율을 확대하고 소액주주들은 기존 지분가치가 희석되는 이른바 '쪼개기 상장'도 논란의 대상이다. 이는 이미 투자자들로부터 오너 일가의 이익만 보장되고 투자자들의 이익은 훼손된다는 지적을 받아오고 있는 부분이다. 상법개정안이 통과되면 이사회 의결을 거쳐야 하는 이 같은 결정에 대해 소액주주들 불복해 소송에 나서는 경우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또 이사 개인이 '충실 의무 위반'으로 소송 당할 우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