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관세 25%에 연 9조원 손실, 3,500억 달러 투자보다 타격 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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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3,500억 달러 투자 이견에 협상 교착 미국이 수익 거의 가져가면 원금 회수 불확실 “차라리 관세 부과 받는 편이 낫다”

한·미 관세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는 가운데 미국이 25%의 상호 관세를 부과하면 한국의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최대 0.4%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지난해 한국의 실질 GDP를 단순 대입하면 연간 최대 9조원의 경제적 손실에 해당한다. 한국 경제에 큰 충격을 줄 수 있는 규모지만 미국이 요구한 3,500억 달러(486조원)의 현금 투자보다는 타격이 작다.
한국 GDP 0.3~0.4% 감소 추정
16일 대외경제연구원의 ‘한·미 관세 협의의 경제적 타당성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이 예고한 대로 25% 관세를 적용할 경우 한국의 실질 GDP는 0.3∼0.4% 감소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이를 지난해 기준 한국의 실질 GDP(2,292조원)에 단순 적용하면 연간 7조~9조원에 해당한다. 실제 연간 피해액은 이보다 줄어들 수도 있다.
보고서를 작성한 김영귀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이 연구는 현재 균형 상태와 미국 관세 정책으로 만들어지는 새로운 균형 두 가지를 비교해서 몇 % 정도의 실제 GDP 변화가 있는지를 추정한 것으로, 새로운 균형으로 이동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를 모형이 말해주는 건 아니다”라며 “균형에 도달하는 시간은 1년보다 조금 더 걸린다”고 설명했다. 미국 관세 정책 영향이 1년이 아니라 2~3년에 걸쳐서 장기간 나타난다면 GDP 0.3~0.4% 감소로 인한 연간 피해액은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관세율이 15%에서 25%로 올라가면 한국이 연간 추가로 부담해야 하는 관세가 260억 달러(약 36조원) 규모에 그친다는 추산도 나왔다. 16일 박수연 메리츠증권 연구원이 작성한 보고서를 보면 관세율 10%가 적용된 올해 5월부터 7월까지 한국은 미국에 관세로 월평균 13억9,000만 달러(약 1조9,200억원)를 지급했다. 이를 토대로 관세율 15%가 적용되면 연간 249억4,000만 달러(약 34조5,000억원)를 미국에 내게 된다. 관세율이 25%로 10%포인트 더 오르면 추가로 260억7,000만 달러를 줘야 한다. 박 연구원은 관세 연간 증가분(260억7,000만 달러)은 대미 투자 펀드 3,500억 달러의 7.5%로, 약 13년 6개월에 걸쳐 나가는 금액이라고 설명했다. 관세를 부과 받는 게 총량면에서 피해를 덜 입는 길이라는 의미다.
다만 피해가 늘어날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최근 타결된 미·일 관세 협상 결과가 변수다. 한·미 관세 협상이 실패해 최종적으로 일본이 15% 관세를, 한국이 25% 관세를 적용받는다면 수출 타격은 예상보다 더 커질 수 있다. 일본산 제품보다 가격 경쟁력에서 뒤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한국은행도 미국 관세 정책으로 국내 경제가 타격을 받는다고 전망했다. 한은은 지난 1일 발간한 보고서에서 한·미 관세 협상이 지연됐더라면 올해 성장률이 0.04%포인트, 내년은 0.1%포인트까지 낮아질 것으로 예측한 바 있다. 한·미 관세 협상이 다시 예측하기 힘든 국면으로 들어가면 불확실성이 커져 유·무형의 경제적 충격이 더 커질 우려도 있다.

"일본이 잘못된 선례 남겨"
앞서 한국은 지난 7월 미국과의 관세 협상에서 상호관세를 낮추는 조건으로 총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한 바 있다. 대미 투자 조건 등 협의를 위해 지난 8일(이하 현지시간) 한미 간 실무협의를 진행한 데 이어 지난 12일에는 뉴욕에서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부 장관이 장관급 협의를 진행했으나 여전히 협의가 진전을 이뤘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해 미국이 사실상 '투자 백지수표'를 요구하며 한국 정부를 강하게 압박하고 있으나, 한국 역시 합리적인 수준의 결론 도출을 목표로 맞서고 있어 협의가 장기간 공전할 가능성도 제기되는 상황이다. 이 경우 7월 한국이 관세 협상을 통해 15%로 낮춘 상호관세가 25%로 원상 복귀될 수 있다.
이 때문에 현재 우리 정부는 협상 결렬에 따른 충격을 감당하기도, 미국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하기도 어려운 딜레마에 놓여 있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외환보유고 4,000억 달러(약 553조원)의 상당 부분이 대미 투자로 빠져나가면 국내 금융시장에 충격은 물론, 국가신인도나 환율, 외환 운용에 큰 부담이 되기에 한국 정부는 미국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상황을 두고 전문가들은 일본이 잘못된 선례를 남긴 영향이 크다고 입을 모은다. 앞서 미일 무역 합의에서 총 5,500억 달러(약 765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한 일본은 이를 시행하기 위한 합의 과정에서 일본에 불리한 조항을 다수 수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일본의 대미 투자처는 미국이 일방적으로 정하고, 투자 이익은 투자 원리금 변제 전에는 미국과 일본이 절반씩 나눠 갖고 변제 후에는 이익의 90%를 미국이 취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아울러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투자처를 지정하면 일본은 45일 이내에 자금을 대야 하고,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관세를 올리겠다는 내용도 담겼다.
이런 상황에서 러트닉 장관은 김정관 장관과의 회담 하루 전인 지난 11일 미 CNBC 방송에 출연해 "나는 그들(한국)이 지금 일본을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유연함은 없다. 일본은 계약서에 서명했다"고 말해 한국에 일본과 비슷한 수준의 합의를 압박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일본이 먼저 미국과 불리한 조건에도 합의문에 서명하면서 미국의 합의 압박에 한국이 협상할 공간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美 1, 2심 법원 “상호관세는 위법” 판단
다만 변수는 남아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상호관세 소송에서 패소할 경우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와 체결한 무역협정이 무효화될 수 있다. 소송은 트럼프 대통령이 올해 4월 2일 만성적인 대규모 무역적자를 국가 안보·경제에 대한 큰 위협으로 규정하고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에 근거해 국가별 상호관세를 부과하면서 시작됐다. 관세로 피해를 본 중소기업 5곳이 트럼프 행정부를 상대로 4월 14일 국제무역법원(USCIT)에 소송을 제기했고, 같은 달 23일에는 오리건주를 비롯한 12개주까지 법적 분쟁에 가세했다.
1심인 국제무역법원은 5월 28일 “관세를 부과할 배타적 권한은 의회에 있다”며 상호관세를 철회하라고 명령했고, 트럼프 행정부는 이에 즉각 항소했다. 하지만 2심에서도 위법 판결을 받았다. 미국 워싱턴 DC 연방순회항소법원은 지난달 29일 트럼프 대통령이 상호관세 부과 행정명령의 근거로 삼은 IEEPA에 대해 “대통령에게 수입을 규제할 권한만 부여할 뿐 행정명령으로 관세를 부과할 권한까지 주지는 않는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IEEPA가 국가 비상사태에 대응해 여러 조치를 취할 중대한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하지만 이들 가운데 어떤 조치도 관세 등을 부과할 권한을 명시하지는 않는다”며 “의회가 IEEPA를 제정하면서 대통령에게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무제한적 권한을 주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현재 트럼프 행정부는 상고한 상태로, 1심과 2심에 이어 대법원에서도 비슷한 판결이 나온다면 트럼프 행정부의 핵심 기조인 관세 정책에 큰 타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한국을 포함해 이미 관세 협상을 체결한 국가들과의 무역 관계도 재조정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