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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고등법원 "유연근무제 악용자, 해고 정당하다" 유연근무제 '부작용'에 신음하는 국내 산업계 재택근무 유지 기업들도 유사한 문제 시달려

'유연근무제'를 두고 국내 산업계 곳곳에서 잡음이 발생하고 있다. 유연근무제의 허점을 악용하는 '근태 불량' 근로자가 증가하며 노사 간 충돌이 잦아지는 양상이다.
SK하이닉스 직원의 '꼼수'
8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등법원은 최근 근로자 A씨가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제기한 부당해고구제재심판정취소 소송에서 "회사 자율 출퇴근제를 악용해 상습적으로 출장 이동시간을 부풀리고 근무시간을 허위 보고한 근로자를 해고한 것은 정당하다"는 판결을 내놨다. 사측의 해고 처분이 과하다고 본 1심 법원의 판결을 뒤집은 것이다.
2005년 SK하이닉스에 입사한 A씨는 2020년 1~6월 이천캠퍼스에서 청주 캠퍼스로 총 30차례 출장하는 동안 23회에 걸쳐 과도한 이동 시간을 사용하고, 근무지에서 무단 이탈한 것으로 확인됐다. 출장을 신청한 후 개인 용무를 본 뒤 오후 5시가 돼서야 청주에 도착해 겨우 12분을 근무한 경우도 있었고, 이천에서 청주까지 장장 7시간 34분 동안 이동하기도 했다. 이천에서 청주까지 차로 이동할 때는 보통 2시간 이내의 시간이 소요된다. 출장지에서 점심시간 이후 1시간 40분 동안 사무실에 모습을 비추지 않은 점, 귀가하는 시간을 출장 시간으로 허위 입력한 점 등도 문제가 됐다. A씨는 사내 징계 절차를 거쳐 2021년 3월 해고됐고, 이후 노동위원회에 재심을 신청했지만 기각됐다. 이에 그는 중앙노동위를 상대로 행정 소송을 제기했다.
1심 법원은 A씨의 손을 들어줬다. 차량 기록, GPS 등으로 '공회전' 정황 등은 확인됐지만, 그것만으로 출장 이동 시간을 과다하게 사용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2심은 이 같은 1심 판결을 인정하지 않았다. 서울고등법원은 "회사 측에서 객관적 자료로 출장 시간이 당초 승인받은 시간이나 통상 소요되는 시간을 초과함을 증명했다면, 이를 정당화할 수 있는 특별한 사정은 (근로자인) A가 이를 주장·증명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판단하에 항소심은 약 5개월간 총 16회의 근태 위반 행위가 발생했다고 봤다. 재판부는 "근태 위반이 반복적이었고 경과실로 보기도 어렵다"며 "사용자와 근로자 간 신뢰라는 유연근무제의 근간을 훼손했고 직장 질서와 업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중대하다"고 꼬집고, A씨의 해고 처분이 정당하다고 명시했다.
모니터링 체계 도입도 어려워
유연근무제를 악용하는 근로자는 이전부터 존재해 왔다. 일례로 지난 2023년 현대차그룹 물류·해운업 계열사 현대글로비스의 일부 직원들은 마우스의 움직임을 통해 근무 상황을 확인하는 근태관리 시스템의 허점을 악용해 징계를 받았다. 회사 안팎의 관계자에 따르면, 이들은 매크로(지정된 명령을 반복 입력하는 프로그램) 등 불법 프로그램을 이용해 마우스를 계속해서 움직인 것처럼 모니터링 시스템을 속인 것으로 전해진다.
곳곳에서 근태 불량 사례가 누적되자, 유연근무제를 도입한 일부 기업은 근태 관리를 위한 모니터링 강화를 시도하고 나섰다. 지난해 LIG넥스원은 20분간 근무자가 자리를 비우면 사유를 입력하도록 하는 '이석 알림' 제도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회사 차원에서 근로자가 자리를 비우는 것을 직접 확인하고, 명확한 출퇴근 시간을 관리하겠다는 구상이었다. LIG넥스원은 해당 기록을 정기적으로 팀장에게 자동 발송하도록 시스템을 설계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근로자들이 이 같은 '감시'에 강력한 거부감을 표출했다는 점이다. 이석 제도 도입 소식이 전해진 이후 LIG넥스원 내부 직원 사이에서는 과도한 제한이라며 반대 의견이 속출했다.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등에서는 "LIG넥스원의 근태 관리 체제가 영국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 구상한 ‘파놉티콘’(간수 한 사람이 죄수 전체를 한눈에 감시할 수 있는 원형 감옥)의 특성을 가졌다"는 비판이 쏟아지기도 했다. 여론이 악화하자 LIG넥스원은 직원들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열고, 이석 제도 도입을 일단 보류하겠다고 밝혔다.

재택근무 폐지하는 기업들
재택근무를 시행하는 기업들 역시 유사한 문제를 겪고 있다. 비대면 상황에서 근태를 관리하는 것이 어렵다 보니, 근로자에 대한 사측의 신뢰가 자연히 훼손되는 것이다. 한 중견 기업 임원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직원들이 어떻게 근무하는지 알 수 없고,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가 발생할 가능성이 상당하다"며 "결국 사무실에 출근해서 일하는 게 가장 현실적이며 효율적"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기업 임원은 "재택근무를 해도 온라인으로 근태나 성과를 평가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다"고 토로했다.
국내 기업들이 줄줄이 재택근무를 폐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난 2023년 카카오는 사무실 출근을 기본으로 하는 근무 제도 ‘카카오 온(ON)’을 도입했다. 2022년 국내 금융권 최초로 상시 재택근무를 시행했던 현대카드도 지난해 6월 전면 사무실 출근을 지시했고, 넥슨, 엔씨소프트, 현대자동차 등도 재택근무를 폐지했다. 네이버의 손자 회사로 메타버스(3차원 가상세계) 플랫폼 ‘제페토’를 운영하는 네이버제트 역시 지난해 4월부터 재택근무를 철회하고 주 4일 출근 제도를 도입했다.
다만 근로자들은 이 같은 흐름에 불만을 표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재택근무 체제가 지속되는 동안 기업 운영에 큰 문제가 생기지 않았음은 물론, 오히려 출퇴근 이동 시간이 사라지면서 직원들의 '워라밸(Work & Life balance, 일과 삶의 균형)'이 확보돼 업무 효율성을 제고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회사와 근로자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시장에서는 각 기업이 처한 상황에 따라 적절한 '타협점'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 시장 관계자는 "유연근무제와 재택근무는 도입 시 나타나는 장단점이 상당히 뚜렷한 편"이라며 "기업들은 업무 형태와 생산 효율성, 직원들의 특성 등을 충분히 고려해 노선을 선택해야 한다"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