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폴리시] 아시아 연대의 열쇠, 무역 전략 아닌 교육 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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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협상력, 관세 아닌 지식과 인적 자본 무역 연합이 안고 있는 분배 갈등과 구조적 한계 교육·연구 협력이 만든 지속 가능한 연대
본 기사는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의 SIAI Business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SIAI 또는 그 소속 기관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시아 지정학에서 가장 중요한 지표는 관세율이나 무역수지가 아니다. 핵심은 지식 자본이다. 2023년 아시아는 세계 특허 등록의 약 70%를 차지했고, 이 가운데 중국이 절반 가까이 발급했다. 지난 10년 동안 아시아의 비중은 13% 높아졌다. 이는 협상력이 물류량이 아니라 인적 자본과 지식 생산에 기반해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미국의 분할·통제 전략에 대응하는 가장 효과적인 길은 무역 연합이 아니라 교육·연구·자격 인증·인재 이동을 축으로 한 협력이다.

분배 갈등과 연대의 취약성
‘아시아판 EU’ 구상은 관세 충격과 수출 변동이 큰 시기에 매력적으로 보인다. 동남아시아 10개국과 한국, 중국 등 15개국이 가입한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은 이미 세계 GDP의 30%, 수출의 4분의 1을 차지한다. 그러나 연대가 흔들리는 이유는 이해관계 부족이 아니라, 이익 배분을 어느 국가도 정치적으로 수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협력적 게임이론(Cooperative Game Theory)은 이 점을 설명한다. 연대가 유지되려면 어느 국가도 다른 국가의 몫을 더 선호하지 않아야 하고, 각국이 단독으로 행동할 때보다 연대 안에서 더 큰 이익을 얻어야 한다. 이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작은 양보에도 균열이 발생한다. 특히 무역 협약은 가치사슬을 따라 이익이 불균등하게 쌓이기 때문에 조건 충족이 어렵다. 중소국은 대형국의 전략 선택에 따른 충격을 떠안을 수 있다는 불안이 크다.
투자 구조가 보여준 교육 협력의 필요성
최근 투자 흐름도 같은 문제를 드러낸다. 지난 10년 동안 서비스 분야 외국인직접투자(FDI)는 전체의 58%로 확대됐고, 절반은 역내에서 이뤄졌다. 기후 관련 그린필드 투자는 2013년 8%에서 2023년 27%로 증가했다. 이는 아시아 통합의 성장 동력이 디지털 서비스, 녹색 기술, 소프트웨어 등 무형·기술집약 분야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분야의 성과는 인재 양성, 자격 상호인정, 연구 협력을 통해서만 공정하게 나눌 수 있다.
재정 여건의 차이도 변수다. 일부 국가는 대규모 산업정책을 추진할 수 있지만, 소규모 국가는 첨단 산업을 감당하기 어렵다. 이런 격차는 무역 연대를 보조금과 보상 거래로 몰아가며, 관리가 어렵고 정치적으로 악용되기 쉽다. 반면 교육 지출, 연구개발 투자, 자격 상호인정은 규칙과 기준에 따라 투명하게 운영할 수 있다. 한국은 GDP 대비 5% 수준의 세계 최고 연구개발 투자율을 기록했고, 중국도 2024년 2.7%까지 높였다. 이 역량은 공동 박사과정, 합동 연구소, 마이크로 자격증 제도 같은 협력 기반으로 전환될 수 있다.

주: 지역-아시아, 북미, 유럽, 아프리카+중남미+카리브해+오세아니아(X축), 특허 등록 비중(Y축)
분야별로 엮이는 협력
2025년 아시아에서 주목할 변화는 거대 연합의 출범이 아니라 분야별 협력의 확대였다. 인도와 중국은 자신을 “경쟁자가 아닌 파트너”라 규정했고, 한국은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와 경제 협력 격상 의지를 밝혔다. 일본은 선거 패배 이후 대중 관계를 둘러싸고 국내 논쟁을 겪고 있다. 이는 ‘아시아판 EU’식 단일 연합과는 거리가 있지만, 안보 노선이 다르더라도 사안별 협력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중에서도 교육은 가장 안정적으로 설계할 수 있는 영역이다.
교육 협력의 차별성
미국의 분할·통치 전략은 개별 국가에 혜택을 제공해 영향력을 확대하는 방식이다. 관세 면제, 공급망 핵심 지점에 대한 라이선스, 특정 기술 분야의 수출 통제 완화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조치는 경쟁적이고 배타적인 이익을 만들어내며, 협상 단위가 작을수록 효과가 크다.
교육 협력은 성격이 다르다. 교사 훈련 기준, 학위 상호인정, 장학금 제도, 에듀테크 안전 규정은 공동의 이익을 기반으로 하고 적용 범위가 넓다. 일단 시행되면 학생, 대학, 기업이 동시에 얽혀 있어 철회할 경우 사회·경제적 비용이 많이 든다. 예를 들어 동일한 마이크로 자격 체계를 여러 도시가 함께 인정하면, 이를 무효화하는 순간 학습 경로와 채용 과정 전체가 흔들린다. 교육 협력은 배타적 혜택을 분리하기 어렵기 때문에 분할·통치 전략이 작동하기 힘든 영역이다.
지식재산이 만든 지속성
협력이 항상 순조로운 것은 아니다. 인도와 중국의 국경 갈등은 여전히 이어지고, 안보 동맹도 분열돼 있다. 그럼에도 교육 분야의 최소 공통프로그램은 추진이 가능하다. 학습자와 기관 모두가 혜택을 받고, 학생 배치·연구 성과·자격 이동성 같은 지표로 성과를 검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정학적 긴장이 높아져도 대학은 교육을 이어가고, 학생은 학업을 계속하며, 연구는 지속된다. 교육 협약은 이런 지속성을 기반으로 한다.
지식재산 흐름도 교육 협력의 타당성을 강화한다. 2023년 아시아는 국제 특허출원(PCT)의 56%, 세계 특허 등록의 70%를 처리했다. 이 지식재산 축적은 아시아 연대가 활용해야 할 핵심 자산이며, 교육은 이를 조율하는 중요한 장치다.

주: 아시아(56%), 유럽(22%), 북미(21%), 오세아니아(1%) 중남미 및 카리브해(0%), 아프리카(0%), 기타(0%)
교육 중심 협약의 설계
‘아시아 교육·연구 이동 협약(ECAMR)’은 무역 중심 연대의 취약성을 보완하기 위한 구상이다. 핵심은 학습자, 연구, 자격을 중심에 두고 기여를 투명하게 배분하는 것이다.
자격 상호인정이 첫 단계다. 아세안은 이미 공학, 건축, 간호 등에서 협정을 운영하고 있으며, 유네스코의 ‘세계 고등교육 자격 상호인정 협약’도 확대돼 한국과 몽골이 가입했다. 대학 학위, 직업교육훈련, 마이크로 자격을 통합하는 ‘자격 여권’을 마련하면, 외교적 긴장 속에서도 협력을 지지하는 기반이 형성된다. 연구와 인재 교류 기금은 국경 간 학생 수, 공동 논문, GDP 대비 연구개발 투자율 같은 지표를 조합해 배분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계산의 정교함보다 각국이 기여가 인정된다고 받아들이는 정치적 수용성이다.
투자 흐름과 연계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신규 투자에 일정 비율의 교육 기금을 배정해 현지 인력 양성과 연구에 활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특정 국가에 반도체 시설이 건설되면, 투자금 일부를 교육과 연구 인프라에 사용하고, 자격은 투자국과 수혜국 모두에서 인정하는 구조다. 에듀테크 분야에서는 데이터 보호, 알고리즘 투명성, 학습 기록 이식성 같은 공동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이는 역내 시장 통합과 지식재산 활용을 동시에 뒷받침한다.
인력 이동은 전면적 자유 이동 대신 분야별 프로그램으로 추진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해양공학, 노인 요양, 재생에너지 등 국가별 수요와 강점에 맞춘 협력이 가능하다. 기업이 공동 자금을 지원하고 교육과정을 연계하면 효과를 높일 수 있다.
교육이 이끄는 지속 가능한 연대
아시아의 협상력은 지식과 인적 자본에 기반한다. 무역 연합은 경쟁적 시장 접근권이라는 취약한 카드와 불균등한 이익 배분이라는 정치적 난제를 안게 된다. 반면 교육 중심 협약은 공공재를 키우고, 이를 사람과 기관에 고정하며, 투명한 규칙으로 배분해 중소국도 안정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한다.
아시아 질서는 단일체가 아니라 겹치고 분화된 구조로 나타나고 있다. 이 속에서 교육은 가장 먼저, 가장 멀리 나아갈 수 있는 분야다. 앞으로의 과제는 자격 상호인정을 제도화하고, 역내 투자에서 일정 부분을 인재 개발에 배정하며, 공동 기금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외부 압박에도 흔들리지 않고, 아시아의 지식 기반을 공동의 힘으로 전환하는 연대 설계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An Asian “EU”? Why Education, Not Tariffs, Is the Coalition Glue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