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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세탁기 등 '철강 파생상품' 목록 추가 삼성·LG, 베트남·멕시코 등에서 생산해 수출 韓 철강, 美 수출 노출도 높아 타격 불가피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냉장고, 세탁기 등 주요 가전제품을 철강 파생상품으로 규정하고, 철강 가치의 50%에 해당하는 고율 관세를 부과하기로 했다. 수출 주력 품목 다수가 관세 인상 대상에 포함된 데다, 적용 시점도 오는 23일로 임박해 국내 가전업계는 긴급 대응에 나섰다. 그러나 삼성전자와 LG전자 등이 미국에 생산기지를 운영하고 있으나, 현지 생산 비중이 작고 대부분의 제품을 한국·멕시코·베트남 등에서 생산하고 있어 관세 회피가 쉽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다.
美, 철강과 철강 파생상품에 50% 관세 부과
16일 업계에 따르면 미국 상무부는 지난 12일(현지 시각) 연방 관보를 통해 50% 철강 관세 부과 대상이 되는 철강 파생제품을 추가했다. 추가된 제품은 △냉장고 △건조기 △세탁기 △식기세척기 △냉동고 △조리용 스토브 △레인지 △오븐 △음식물 쓰레기 처리기 등이다. 해당 품목에 대한 관세는 오는 23일부터 적용된다. 앞서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 3월 철강과 철강 파생상품에 25% 관세를 부과했다. 이어 지난 4일에는 철강 관세를 50%로 두 배 인상했다. 현재 영국을 제외한 대부분 국가에서는 50% 관세가 적용된다.
관세 사정권에 든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즉각 대응 방안 검토에 나섰다. 양사 모두 미국에 생산기지를 두고 있으나, 현지 생산은 세탁기 등 일부 제품에 국한돼 있다. 이번 관세를 피하려면 미국산 철강을 써야 하는데 현지 생산가전에서 미국산 철강이 차지하는 비중도 크지 않은 데다 이 외 주요 제품은 한국, 멕시코, 베트남 등에서 생산해 미국으로 수출하기 때문에 관세 부담을 피하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KB증권에 따르면 이번 추가 관세 부과 항목의 대미 수출액은 2024년 기준 36억 달러로, 전체 대미 수출의 2.8%를 차지한다.

美 관세 장벽으로 다른 나라 공급망까지 위축
트럼프 행정부의 철강 관세 강화 조치로 가전업계뿐 아니라 철강 업계 전반에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국내 철강업계는 트럼프 1기 행정부 당시 철강 관세 협상을 통해 지난해까지 연간 263만 톤의 수출 쿼터를 확보해 왔다. 한국철강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대미 철강 수출량은 277만 톤(9.8%)으로 유럽연합(EU), 일본, 인도에 이어 4번째로 많다. 대미 수출 비중은 10% 수준이지만, 업계가 체감하는 부담은 그 이상이다. 핵심 수출 시장인 미국 공략이 더 어려워졌을 뿐 아니라 글로벌 공급망 위축으로 제3국에 대한 수출길까지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철강 시장은 양적 성장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성장할 가능성이 높은 시장으로 평가받는다. 미국의 연간 철강 수요는 9,000만 톤 내외로 이 중 20%를 수입에 의존한다. 수입량은 EU에 이어 2위로, 단일국가로는 최대 규모다. 여기에 트럼프 행정부가 제조업을 미국 내로 끌어오려는, 이른바 ‘리쇼어링’ 정책을 추진하면서 자동차와 가전제품에 들어가는 고부가가치 특수강판에 대한 수요도 많아지는 상황이다. 석유 생산량을 더 늘리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에너지 정책도 유정용 강관, 송유관 등 특수 철강 수요를 빠르게 늘리고 있다.
또한 미국은 생산비가 많이 들고 내수 수요가 견고해 철강 가격이 다른 나라에 비해 높게 형성돼 있다. 한국신용평가는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서 미국 철강 시장의 전략적 중요성으로 '높은 가격'을 꼽았다. 철강 컨설팅 업체인 멥스인터내셔널 자료에 따르면 미국 시장의 철강 가격은 다른 국가에 견줘 20∼30% 높다. 2024년 12월 열연강판 가격은 세계 평균이 톤당 631달러인 반면, 북미 평균은 톤당 753달러였다. 지난해 한국 철강 수출에서 미국이 수출량 기준으로는 4위였지만, 수출액 기준으로 2위에 올라선 것도 비싼 가격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미국의 초고율 관세 여파로 제3국 수출길까지 막힐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미국의 관세를 뚫지 못한 물량이 다른 나라로 대거 유입될 경우,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각국이 무역 장벽을 강화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EU는 최근 무관세 철강 수출 할당량을 14% 줄였고, 인도도 저가 철강에 대해 12%의 관세 부과를 결정했다. EU와 인도는 각각 한국 철강의 1위와 3위 수출 시장이다. 앞서 글로벌 전기차 시장에서도 미국의 관세를 피해 중국산 차량이 무역 장벽이 낮은 국가로 몰려들며 현지 내수 시장을 잠식한 사례가 있었다.
S&P "美 철강 관세로 韓 업체 경쟁력 약화"
전문가들의 분석도 다르지 않다. 국제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푸어스 글로벌 레이팅스(S&P)는 보고서를 통해 미국의 철강 관세 부과로 한국 철강업계가 다른 아시아권 철강사보다 더 큰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S&P는 보고서에서 "한국 철강업체들은 그동안 쿼터 내에서 관세 면제 혜택을 받아왔으나 해당 조치가 종료되면 경쟁력이 약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대미 철강 수출 비중이 5% 미만인 중국(2%), 일본(4%)에 비해 한국의 미국 시장 노출도가 크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번 관세 부과는 포스코와 현대제철 등 한국 철강 대기업에 더욱 치명적일 수 있다. 현재 포스코의 모기업 포스코홀딩스는 이차전지 소재 사업 확대로 자본 지출이 급증하면서 차입금이 상당히 증가한 상태다. 이러한 가운데 가격이 높은 미국 철강 수출 물량 감소는 전사의 수익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현대제철도 경쟁 심화와 내수 침체, 중국산 저가 철강의 공급 과잉 등으로 이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 관세까지 겹치면서 자산 매각, 사업 재구조화, 생산 감축 등 구조조정에 나서고 있다.
S&P는 "미국의 철강 관세가 국내 철강업체의 신용등급에도 부정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미국 관세로 인해 국내 철강업체의 매출이 한 자릿수 초·중반대, 영업이익은 한 자릿수 중·후반대 수준으로 감소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관세의 영향이 한국 철강 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제한적일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포스코, 현대제철 등을 제외하고 전체 철강사를 보면 미국 수출 노출도가 비교적 낮은 데다 가격 경쟁력 저하는 불가피하나 일부 기업의 경우 오히려 수혜를 받을 가능성도 있다는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