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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검찰, 전 외교장관 비서 등 총 4명 기소 中으로 간 정보, 대만 단교·고립 전략에 이용 대만에 침투한 간첩, 5,000명 이상으로 추정

중국과 대만 간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중국 간첩이 대만 정계에 깊숙이 침투해 장기간 활동해 온 실상이 드러나 대만 사회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간첩으로 적발된 이들은 대만 민주진보당(민진당)과 정부의 전·현직 고위 인사들과 가까운 인물로, 차이잉원 총통 재임 시절 대만 외교장관과 수교국 인사의 회담 내용을 수년간 중국으로 빼돌린 사실이 확인됐다. 이들의 손을 거쳐 중국으로 넘어간 기밀문서들은 중국의 대만 고립 전략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2003년 中 정보기관에 포섭돼 장기간 활동
12일 자유시보, 연합신문망 등 대만 언론에 따르면 타이베이 지방검찰청은 10일 민진당 전 간부였던 황취룽, 우상위, 허런제, 추스위안 등 4명을 국가보안법 및 국가기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검찰은 이들 중 황취룽을 핵심 인물로 보고 국가기밀 유출, 자금세탁 등의 혐의로 총 30년 6개월의 징역형을 구형했다. 검찰에 따르면 황취룽은 2003년 사업차 중국을 방문했을 당시, 중국 중앙군사위원회 소속 정보요원에게 포섭된 뒤 약 22년간 중국 측으로부터 활동 자금을 받으며 대만 내 간첩 조직을 운영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민진당 소속 리위뎬 신베이시 전 의원의 특별보좌관이었던 황취룽은 정부 기밀에 접근할 수 있는 민진당 인사들을 포섭해 왔는데, 2017년 친구인 추스위안 민진당 민주대학 전 부교장을 태국, 마카오 등지에서 중국 정보요원들과 만나게 했다. 그를 통해 라이칭더 현 총통이 부총통이던 시절, 비서관이던 우상위와 우자오셰 당시 외교장관(현 국가안전회의 비서장)의 비서였던 허런제를 끌어들였다. 검찰은 황취룽과 추스위안이 중국 정보기관으로부터 각각 600만 대만달러(약 2억7,000만원), 221만 대만달러(약 1억원)를 받았다고 전했다.
뿐만 아니라 황취룽은 우상위와 허런제를 통해 2022년 12월~2024년 1월까지 라이 당시 부총통과 우 장관이 수교국 등 외국 인사들과 나눈 대화와 비밀회담 내용 등을 수집해 중국 국가안전부로 넘긴 것으로 조사됐다. 중국 측에 넘어간 정보 중에는 라이 총통이 2023년 부총통 자격으로 파라과이를 방문했을 당시의 일정 전체가 포함됐는데 이는 대만의 중남미 전략을 파악하는 정보로 활용됐다. 이 외에도 대만·미국 21세기 무역 이니셔티브 관련 문서, 우방국 단교 관련 대만 정부의 비상 대응책 등이 유출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른바 ‘총통부 침투 간첩 사건’으로 불리는 이번 사건은 올해 2월부터 검찰과 국가안전국의 합동 수사가 진행됐으며, 수사 2개월 만인 지난 4월 사건의 윤곽이 드러나면서 대만 사회에 충격은 안겼다. 중국시보 등 대만 언론은 이들이 넘긴 정보가 중국이 대만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는 전략을 설계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줬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중국이 외교 공세를 펼치면서 2016년 22개국이던 대만의 수교국은 현재 12개국으로 줄었다. 특히 대량의 외교 문건이 중국 측에 넘어간 2019년 이후로만 8개국과 대만과 단교했다.

반역 조직 결성해 국가전복계획 이행하기도
이 사건 외에도 최근 대만에서는 중국 정보기관이 배후에 있는 간첩 사건이 잇따라 적발되고 있다. 올해 1월에는 육군 6군단의 부사령관(중장)을 역임한 가오안궈 중화민국 대만군정부 총소집인과 장모 퇴역 군인 등 6명을 국가안전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검찰에 따르면 가오안궈는 2018년 중국 정부에 포섭돼 962만 대만달러(약 4억2,000만원)에 달하는 지원금을 받았다. 군 관계자는 "국가 반역 조직을 결성해 정부 기관 공격, 정계 인사와 군경 살해 등 국가전복계획을 구체적으로 행동으로 옮긴 첫 번째 사건"이라고 지적했다.
대만 언론에 따르면 국가안보 관련 범죄 등을 수사하는 법무부 산하 조사국과 국방부 정치 작전국이 각각 2020년과 2022년에 가오안궈에 대한 첩보와 신고를 접수하고 내사를 진행했다. 이들을 기소한 검찰은 가오안궈 무리가 중국 침공 시 대만 내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대만 정부의 전복과 정권 장악을 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현역 군인을 포섭해 군사 기밀과 군사 요새의 전략적 배치 정보 수집을 시도했으며, 무인기를 이용해 군의 이동식 기동 레이더 차량을 미행 및 감시해 그 결과를 중국에 보고했다고 덧붙였다.
양안 관계 긴장감 고조, 방첩 역량 강화해야
대만에서는 2016년 독립 성향의 차이 총통 취임 이후 양안 관계가 냉각되면서 간첩 혐의로 체포되는 군인들이 늘고 있다. 2023년에는 중국으로부터 공작금을 받은 뒤 전쟁이 나면 투항하겠다고 서약한 대만 육군 고위급 장교에게 징역 7년 6개월 형이 확정됐다. 이어 올해 3월 전직 공군 소령 스쥔청과 현역 공군 대위 쉬잔청이 전투기의 대함미사일 자료 등 군사기밀을 유출한 혐의로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스쥔청은 사업차 중국을 방문하던 중 포섭돼 활동 자금과 뇌물을 받았으며, 귀국 후 후배 장교까지 추가로 끌어들인 것으로 드러났다.
중국시보 등 대만 언론은 현재 대만에 잠복한 중국 간첩 수가 5,000명을 넘을 것으로 추산한다. 1980∼1990년대 국가안전국(NSB)를 이끌었던 쑹신롄, 인쭝원 전 국장은 중국 간첩 5,000명이 대만에 잠입해 있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다. 이어 천수이볜 총통 시절인 2023년 국방부 군정 부부장을 역임한 린중빈 전 부부장 또한 잠복한 중국 간첩이 5,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는데 현재 양안 정세를 고려하면 이 수가 훨씬 늘었을 것이란 분석이다.
린중빈 전 부장은 대만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과거 총통부를 비롯해 대만의 본토 담당 기구인 대륙위원회 등의 회의 자료가 너무나 빠르게 외부 유출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대만 각계각층 내 중국 간첩들의 존재를 확신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NSB '중국간첩사건 침투 수법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간첩 활동과 관련한 기소 건수와 인원이 2021년 3건 16명, 2022년 5건 16명, 2023년 14건 48명, 2024년 15건 64명으로 해마다 증가했다.
류더량 전 군사정보국(MIB) 국장은 안보적 위협의 심각성을 강조했다. 그는 "만약 간첩들이 정부·정당·싱크탱크·기업 등을 공격 목표로 설정해 잠입했다면 그 위협은 상상 이상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중국 간첩 사건의 경우, 통상 증거 확보에만 2~3년이 걸릴 정도로 정교하게 은폐되며, 이는 역설적으로 대만이 일정 수준의 방첩 능력을 갖췄음을 방증한다"며 "이제 양안 관계에서 정보 작전만 중시할 게 아니라 감찰 시스템과 보안 인력, 관련 예산을 확충해 방첩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