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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금 인상 제한·이용자 권익 보호 조건
법적 허들 넘었지만 주주 간 협의 아직
주주 가치 내세운 KT 입지 약화 가능성

티빙과 웨이브의 합병안이 공정거래위원회의 조건부 승인을 받으며 연내 통합 OTT 출범 가능성이 높아졌다. 다만 티빙의 기존 주주인 KT가 여전히 반대 의사를 거두지 않은 만큼 실제 합병 시점은 아직 불투명한 상황이다. 이에 업계에선 양사의 합병이 국내 콘텐츠 시장 경쟁 구도를 바꾸는 대형 변수라는 평가와 함께 주주 간 이해관계 조율이 관건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시장 2·4위 사업자 간 합병, 경쟁제한 우려 크지 않아
10일 공정위는 “CJ ENM 및 티빙 임직원이 웨이브 임원 지위를 겸임하는 내용의 기업결합 신고를 심의한 결과 조건부 승인으로 결론이 났다”고 밝혔다. 티빙과 웨이브는 2023년 말 합병 양해각서(MOU)를 체결하며 국내 최대 OTT 출범을 알렸지만, 양사 주주 간 이해관계가 맞물리며 올해 초까지 합병에 진척을 보이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 공정위 승인에 따라 양사 임직원의 상호 이사 등재가 가능해진 만큼 두 OTT 간 최종 통합에도 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다만 공정위는 두 회사의 결합이 국내 OTT 시장 경쟁을 제한할 우려가 있다고 보고 시정조치를 부과했다. 각각의 단독 상품을 없애고 결합 상품을 출시해 OTT 시장 상위 4개 서비스(넷플릭스·티빙·쿠팡플레이·웨이브)가 3개로 줄어들면, 가격 설정 능력이 높아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지난해 말 기준 OTT 시장 점유율은 넷플릭스가 33.9%로 1위였으며, 티빙과 웨이브는 각각 21.1%, 12.4%로 2위와 4위를 기록했다.
이에 따라 기존 티빙과 웨이브 사용자는 내년 12월까지 현재 구독 중인 모델을 그대로 이용할 수 있다. 공정위는 두 서비스가 하나로 통합될 경우, 현행 요금제와 가격대·서비스가 유사한 신규 요금제를 출시해 내년 12월 31일까지 유지하게 했다. 기존 요금제 이용자는 통합 이후에도 해당 요금으로 서비스를 계속 이용할 수 있으며, 해지 후 한 달 내 재가입하면 다시 기존 요금제를 선택할 수 있다.
나아가 공정위는 콘텐츠 다양성과 이용자 선택권 보장도 강조했다. 합병 이후 하나의 OTT로 통합되더라도 각 플랫폼에서 제공하던 독점 콘텐츠의 품질과 접근성은 유지돼야 한다는 설명이다. 이는 일각에서 제기된 독과점 우려를 불식시키고, 문화 콘텐츠 생태계 전반의 경쟁력을 유지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업계 관계자들은 이런 조건들이 향후 콘텐츠 투자 및 운영 방향에도 큰 영향을 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티빙 지분 보유한 KT스튜디오지니가 열쇠
공정위의 조건부 승인으로 법적 허들은 넘었지만, 티빙과 웨이브의 합병이 실제로 성사되기까지는 아직 한 단계가 남아 있다. 바로 티빙의 기존 주주인 KT의 동의다. 현재 티빙의 최대 주주는 48.9%의 지분을 보유한 CJ ENM이지만, KT 산하의 KT스튜디오지니도 13.5%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합병법인이 출범하려면 주주 간 협의가 필요한 만큼 KT로선 지분 정리나 경영권 보장 등에서 원하는 조건을 제시할 수 있는 상황이다.
업계에선 공정위 승인과 관련해 티빙 측이 서둘러 합병 신고를 낸 것도 KT를 압박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해석이 주를 이룬다. 법적 승인을 먼저 확보한 뒤, KT에 “이제 당신들만 남았다”는 메시지를 던진 셈이다. 공정위가 예상보다 빠른 결정을 내린 것도 이 같은 티빙의 속도전이 주효했단 평가다. 다만 KT를 설득할 명분이 부족하다는 시선도 존재한다. KT 측의 전략적 입장이 확고한 만큼 지분 정리에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란 관측이다.
KT 콘텐츠 유통 전략 수정 불가피
KT는 티빙과 웨이브의 합병이 주주 가치를 훼손할 우려가 크다는 입장이다. 지난달 14일 서울 모처에서 열린 KT 미디어 부문 기자간담회에서 김채희 부문장은 “웨이브가 지상파 콘텐츠의 독점력이 떨어져 가고 있는 상황에 합병을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성장의 방향성과 가능성이 티빙의 주주 가치에 부합하는지 의문이 든다”고 밝혔다. 이어 “KT가 티빙에 투자한 건 사업적 시너지를 고려한 전략적 투자”였다며 “당시의 사업 협력에 대한 의지와 가치가 지금은 많이 훼손된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 같은 발언의 이면에는 훨씬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KT가 겉으로는 주주 가치를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로는 합병 이후 자사에 돌아올 실익이 급감하는 구조를 문제 삼고 있단 관측이다. 그간 KT스튜디오지니는 ‘신병’ 시리즈, ‘라이딩 인생’ 등 자사가 제작한 오리지널 콘텐츠를 티빙에 독점 제공하는 방식을 통해 시너지 효과를 노려왔다. 하지만 합병 이후 새로운 OTT가 출범하면, 이 같은 전략이 무력화될 가능성이 커진다.
이번 합병을 웨이브의 최대 주주인 SK텔레콤(SK스퀘어)이 주도하고 있다는 점도 KT엔 큰 부담이다. 과거에는 CJ ENM이 티빙을 중심으로 국내 OTT 생태계를 주도했고, KT는 그 아래에서 콘텐츠를 공급하며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SK텔레콤이 CJ ENM의 지분을 인수하고, 티빙과 웨이브를 통합하는 구조에서는 KT의 지분 가치 또한 축소될 수밖에 없다. 콘텐츠 유통 전략과 시장 내 존재감이 함께 위협받는 셈이다.
이에 KT는 향후 플랫폼 독립성과 전략적 영향력을 보장받지 못한다면 굳이 티빙에 잔류할 유인이 없다는 입장이다. 그간 티빙과 끈끈한 결속력을 강조해 온 KT스튜디오지니가 여타 OTT와의 협업에 나선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KT스튜디오지니는 지난달 12일부터 이달 10일까지 방영된 ENA 드라마 ‘당신의 맛’을 자사 스트리밍 서비스 지니TV와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한 바 있다. KT 관계자는 “자사 지식재산권(IP)의 경쟁력을 바탕으로 외부 플레이어와의 제휴를 확대하는 게 우리의 새로운 전략”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