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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유럽 수출 재개로 유연성 강조 美, 반도체 규제 완화 빅딜 검토 글로벌 공급망 ‘인질 상태’ 지속

중국이 유럽을 향해 희토류 수출의 문을 다시 열면서 미국에는 간접적 압박을 가하는 ‘선택적 수출 전략’을 본격화하는 모습이다. 이에 외교계에선 미국이 런던에서 열리는 중국과의 2차 무역 협상에서 반도체 수출 규제 완화 카드를 꺼내 들 것이란 관측이 제기된다. 다만 이 같은 시나리오에도 세계 공급망은 이미 중국발 희토류 통제의 여파로 흔들리고 있어 각국의 전략 자립을 위한 산업 구조 재설계 또한 시급한 상황이다.
수출 재개 대상에서 美는 제외, 협상 우위 노림수
9일(이하 현지시각) 외교계에 따르면 미국과 중국의 고위 관리들은 이날 영국 런던에서 무역 분쟁을 해소하기 위한 회담에 돌입했다. 런던 랭커스터 하우스에서 진행되는 이번 회담에는 스콧 베센트 미 재무부 장관과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부 장관, 제이미슨 그리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 허리펑 중국 부총리가 이끄는 중국 대표단이 참석했다. 러트닉 장관이 중국과의 무역 협상에 직접 참석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앞서 양국이 90일간 관세 유예로 뜻을 모은 제네바 회담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외교계는 미국의 수출 통제를 감독하는 기관을 총괄하는 러트닉 장관이 회담에 참석하는 만큼 희토류 관련 논의가 본격 전개될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은 지난 4월 4일부터 △사마륨 △가돌리늄 △테르븀 △디스프로슘 △루테튬 △스칸듐 △이트륨 등 희토류 7종과 관련 합금·산화물·화합물에 대한 수출 통제를 실시한 바 있다. 해당 품목을 수출하려는 기업에 자국 국무원 상무 주관 부처에 허가를 받도록 한 것이다. 나아가 최근에는 희토류 산업에 대해 거래량과 고객 정보 등의 온라인 신고를 의무화하는 추적 시스템까지 도입하면서 규제의 강도를 높이기도 했다.
그러나 해당 조처 이후 글로벌 산업계의 공급 부족과 생산 차질이 현실화하자, 유럽에 희토류 수출을 재개하고 나섰다. 7일 중국 상무부는 “정부는 조건을 갖춘 기업의 신청에 대해서는 ‘녹색 통로(green channel)’를 마련해 심사와 승인 절차를 빠르게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허융첸 중 상무부 대변인은 “희토류 관련 품목은 뚜렷한 군·민 양용 속성을 지니고 있어 수출 통제를 시행하는 것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관행”이라고 말했다.
이는 미국을 향한 간접 압박의 수위를 높이려는 의도로 읽힌다. 유럽 산업계에 희토류를 신속하게 공급하겠다는 의지를 밝힘으로써 미국 측에 협상의 여지를 남겨두겠다는 정치적 제스처란 해석이다. 전기차 및 배터리 중심의 유럽 제조업계는 중국의 공급 재개로 한숨을 돌린 반면, 미국 내 자동차·기술기업들은 자국 정부의 대응만을 기다리는 불안한 처지에 놓여 있다는 점도 이 같은 해석에 무게를 더한다. 중국으로선 단순한 경제적 선택을 넘어서 자원무기화를 외교 카드로 적극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익–안보 사이 고심, 전략산업 줄타기 계속
중국의 선택적 수출 전략이 본격화하면서 미국은 반도체 수출 규제 완화라는 맞대응 카드를 검토 중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런던 회담이 개시되기 직전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희토류 확보가 우선”이라며 반도체 및 칩 관련 수출 제한 조치를 완화할 수 있다는 뜻을 내비쳤고, 케빈 해싯 미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 역시“(회담 이후) 우리는 미국의 모든 수출 통제가 완화되고 중국에선 희토류가 대량으로 풀릴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다만 칩 수출 제한을 두고 미국 내 의견은 분분하다. 국가 안보와 산업 경쟁력 보호를 위해 대중국 수출 규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강경론과 희토류 공급망 정상화를 위해 일부 유연한 조정이 필요하다는 실리론이 충돌한 것이다. 실리론자들은 희토류 수입 불안정성이 장기화할 경우 자국 제조 업계의 ‘셧다운’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이는 정부를 향한 정책 완화 압박으로 이어지고 있다.
결국 미국은 칩 수출 완화와 희토류 수입 재개의 맞교환을 통해 단기적 숨통을 틔우는 것은 물론 대체 공급망 확보라는 중장기 과제까지 떠안게 됐다. 최근 미국 에너지부와 상무부가 중심이 돼 캐나다, 호주, 아프리카 자원 생산국과의 전략적 파트너십을 확대하는 것도 이와 같은 위기의식의 연장선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자동차·반도체·배터리 줄줄이 여진
미국을 제외한 여타 국가들도 이번 사안을 예의주시하는 모양새다. 중국의 희토류 수출 통제가 장기화할 경우, 글로벌 공급망 전체가 ‘병목 지대’로 진입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희토류는 전기차, 반도체, 배터리, 방위산업 등 거의 모든 전략산업의 핵심 소재로, 기술 경쟁의 본질을 뒤흔드는 자원 외교 이슈라는 점에서 그 파급력이 상당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는 중국의 수출 통제 이후 급등한 희토류의 가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국 시장조사기관 아거스미디어(Agus MediA)에 의하면 고성능 자석에 사용되는 디스프로슘과 테르븀은 4월보다 5월 가격이 3배까지 치솟았으며, 이달 6일 기준 디스프로슘은 1kg에 750달러(약 102만원), 테르븀은 킬로그램당 2,850달러(약 388만원)로 4월보다 2배 이상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방산 부문에 사용되는 이트륨 역시 지난 2개월 동안 약 6배 급등해 1kg에 45달러(약 6만1,000원)를 기록 중이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상황을 지정학적 위기와 공급망 재편이 결합된 복합 위기 국면으로 보고 있다. 희토류를 비롯한 필수 자원의 지정학적 무기화가 그 파급력을 키우면서 세계 경제 또한 갈수록 불안정한 국면을 마주할 것이란 지적이다. 일본 특수강 제조어업체 프로테리얼(옛 히타치메탈스) 관계자는 “과거에는 돈만 있으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던 희소 자원이 이제는 정치적 동맹 여부에 따라 배급되는 시대로 전환되는 추세”라고 진단하며 “일본과 한국처럼 기술 중심 국가일수록 자원 수급 불안정에 취약해지는 구조적 리스크 또한 커지는 구조”라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