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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가세 인상 공론화 수순 돌입
정치권은 ‘비판 여론 회피’ 급급
서민 부담↑, 형평성 논란 우려도

다수의 국제기구와 연구기관이 한국 정부에 부가가치세 인상을 권고하며 증세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세수 부족이 장기화하고 물가도 안정된 지금이 적기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지만, 정부와 정치권은 여전히 공식 언급을 꺼리며 책임을 회피하는 양상이다. 특히 부가세는 서민에게 더 큰 부담을 주는 간접세이기에 소득세·자산세 등 직접세 개편 없는 증세는 형평성 논란을 피하기 어렵다는 우려 또한 커지는 모습이다.
“세수 부족 장기화에 재정건전성 우려”
2일 조세재정연구원에 따르면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해 말 한국 정부, 한국은행 등과 연례 협의를 거쳐 올해 초 발간한 보고서에 부가가치세 인상을 골자로 한 한국의 세입 확충 방안을 담았다. 부가세 세율 인상과 감면 조정, 개인소득세 세액공제 등을 정비해 세수를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부가세는 재화·용역에 생성되는 부가가치(마진)에 붙는 국세(간접세)로 공급가액의 10%를 차지한다. 납세의무자는 사업자지만, 물건값에 세금이 포함돼 있어 실제로는 최종 소비자가 부담하는 구조다. 사업자는 상품을 판매하거나 서비스를 제공할 때 거래금액에 부가세를 징수한 후 납부해야 한다.
IMF는 한국의 부가세율이 주요국 대비 매우 낮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번 보고서에서 “한국의 부가세 세율은 현행 10%로 선진국 평균인 18.5%보다 낮다”며 “여기에 감면 규모 또한 증가 추세에 있어 세수 부족을 심화하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짚었다. 실제 국회예산정책처에 의하면 이탈리아의 부가세율은 22%에 달하며, 영국과 프랑스도 각각 20%의 부가세를 징수 중이다.
앞서 작년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부가세 인상을 제안한 바 있다. 당시 OECD는 “한국의 낮은 부가세율은 재정 안정성에 구조적 부담을 주고 있다”며 “점진적인 인상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OECD 37개 회원국 중 한국보다 부가세율이 낮은 곳은 캐나다(5%)와 스위스(7.7%) 단 두 나라뿐”이라고 부연했다. 캐나다와 스위스의 경우 연방에서 지정한 부가세 뿐만 아니라 주(State) 별로 추가로 징수하는 세금이 더 있는 만큼, 실질적으로 한국이 일본과 더불어 가장 낮은 부가세를 운영하고 있는 셈이다.
최근 경제 환경 또한 부가세 인상 추진의 명분을 강화하는 모습이다. 한국의 물가 상승률은 코로나19 팬데믹 당시를 제외하면 2% 안팎으로 안정세를 보이고 있으며, 이에 따라 물가 자극에 대한 우려도 다소 누그러진 상태다. 고물가 시기에는 부가세 인상이 소비자 부담으로 직결될 공산이 크지만, 지금과 같은 저물가 상황은 정책 집행의 적기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조세 저항 우려에 ‘신중 모드’ 고수하는 정부
조세재정연구원(조세연)은 지난 2023년 말 ‘부가가치세의 장기 세원 분포 전망’ 보고서를 통해 “저출생·고령화에 평균 소비 성향마저 둔화하며 2050년 부가세 세수가 기존 전망치보다 100조원 이상 줄어들 것”이라고 분석했고, 지난해 5월 발행한 ‘예산춘추’ 보고서에서도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현재의 조세 체계에서 재원 조달을 위해 가장 먼저 고려할 수 있는 세목은 부가가치세”라고 강조했다.
이처럼 다수의 국제기구와 국책연구기관이 부가가치세 인상을 줄줄이 권고하고 있지만, 국내 정치권은 여전히 이 민감한 의제에 대해 입을 닫고 있다. 부가세는 전체 국세 수입 중 세 번째로 규모가 큰 세목인 만큼 증세의 효과가 극적이라 인상에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기획재정부는 부가세가 1977년 도입 이후 47년간 조정이 없었기에 세수가 모자랄 때마다 학계에서 ‘단골’처럼 언급됐을 뿐이라는 시각 또한 갖고 있다.
이 같은 정치권의 침묵은 세수 부족 문제를 외면한 채 단기적 정치 셈법에 갇혀 있다는 비판으로도 이어진다. 정부가 사실상 손을 놓은 사이 부가세 인상론은 외부 권고라는 형식으로만 반복되고 있으며, 국민은 불안정한 세금 논의의 흐름에 피로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작금의 상황이 정치 전반에 대한 불신을 심화한다는 게 학계의 비판론적 목소리다.

직접세·소득세 개편 병행 필요성 대두
부가세 인상 시 현실화할 수 있는 문제로는 조세 부담의 역진성을 꼽을 수 있다. 소득 수준과 무관하게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간접세의 특성상 생활 필수재에 대한 소비 비중이 높은 저소득층일수록 체감하는 부담이 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책 결정권자들로선 “부자들의 지갑은 그대로 두고 서민들 주머니만 턴다”는 비판에 직면할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하는 셈이다.
더욱이 현재 조세 구조상 고소득층이 부담하는 소득세나 자산 관련 직접세에 대한 개편 논의는 상대적으로 미비한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부가세만 단독으로 인상된다면, 이는 형평성 없는 증세라는 프레임을 벗어날 수 없다. 부가세는 세수 비중에서 소득세 및 법인세와 비슷한 비중을 차지하지만, 정책당국이 가장 쉽게 손볼 수 있는 세목으로 꼽힌다. 그러나 그 편리함 이면에는 ‘누구에게 더 무겁게 작용하느냐’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이번 논의는 더욱 민감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부가세 인상과 함께 고소득층에 대한 소득세율 조정, 금융·자산 과세 강화 등 직접세 개편이 동시에 추진돼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그래야만 사회 전체가 납득 가능한 조세정의의 틀이 갖춰질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소득 불균형이 고착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조세 정책이 분배 정의를 무시한 채 편의적으로 운영될 경우, 그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결국 관건은 ‘어떻게 나눌 것인가’로 귀결되는 양상이다. 부가세 인상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조세 형평성과 구조 개편의 정당성이다. 지금처럼 서민 부담만 가중될 수 있는 세제 조정은 오히려 국민 저항을 가중할 뿐이며, 장기적으로 조세 정책의 신뢰 자체를 무너뜨릴 수 있다. 증세가 불가피하다면, 그 방식 역시 사회적 합의와 공정성을 중심으로 재설계돼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관된 견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