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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100억·SK 80억·한화 56억·현대차 47억 반도체법·IRA·수출통제·한미관계·조선 등 현지 투자 및 새 정부 출범 대응 차원
한국 기업들의 대미 로비 금액이 작년 역대 최고 수준으로 증가한 것으로 파악됐다. 반도체법(CHIPS Act)과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등 미국의 공급망 재편 정책에 맞춰 대미 투자를 확대하고 새 행정부 출범에 대비하는 과정에서 미국 정부와 의회를 상대할 일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韓 기업들 美 로비 활동에 큰돈, 삼성만 100억
23일(현지시간) 미국 상원에 접수된 기업별 로비 신고 내용을 보면 삼성그룹은 2024년 총 698만 달러(약 100억3,000만원)를 로비에 지출했다. 이는 삼성전자, 삼성반도체, 삼성SDI, 이매진 4개 기업을 합산한 금액이다. 삼성그룹의 로비액은 2021년 372만 달러, 2022년 579만 달러, 2023년 630만 달러로 꾸준히 증가했으며 2024년이 역대 최대 금액이다. 삼성이 상원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삼성의 로비는 △지식재산권 △한미관계 △국방수권법 △외국기업의 대미 투자 △반도체법 △통신 정책 △공급망 △양자·다자 무역 정책 △사이버 보안 △인공지능(AI) 정책 △세제 △디지털 격차 등 다양한 의제를 아울렀다.
SK그룹은 2024년 559만 달러(약 80억3,000만원)를 써 주요 대기업 집단 중 2위를 기록했다. SK그룹이 로비 자금을 가장 많이 쓴 해는 612만 달러를 쓴 2021년이었다. SK이노베이션이 LG에너지솔루션과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 분쟁을 벌이면서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의 SK이노베이션 제품 수입 금지를 막기 위해 미국 행정부와 정치권을 상대로 사활을 걸고 로비할 때였다. SK그룹의 작년 로비 활동은 △미국 정부의 반도체 수출통제와 공급망 정책 △반도체 투자 △반도체법 △AI △IRA △전기차 △청정에너지 △제약 등에 집중됐다. 현안이 많은 만큼 로비 대상도 연방 상·하원, 상무부, 산업안보국(BIS), 국제무역청(ITA), 국가안보회의(NSC), 국가경제위원회(NEC), 국방부, 국무부, 에너지부, 교통부, 미국무역대표부(USTR), 재무부 등으로 다양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2024년 328만 달러(약 47억1,000만원)를 썼다. 이는 현대차와 자회사인 기아차, 현대제철, 슈퍼넬, 보스턴 다이내믹스의 로비를 합친 금액이다. 현대차그룹의 로비액은 2021년 291만 달러, 2022년 336만 달러, 2023년 323만 달러로 최근 몇 년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의 로비 현안은 △수소와 연료전지 정책 및 인프라 △전기차 인프라와 세제 혜택 정책 △IRA의 청정에너지 세액공제 △환경보호청(EPA)의 배출가스 규제 △커넥티드 차량 등이다.
한화그룹은 2024년 총 391만 달러(약 56억2,000만원)를 로비에 썼다고 신고했다. 미국 사업을 확장하면서 로비액이 2021년 64만 달러, 2022년 90만 달러, 2023년 158만 달러로 빠르게 늘었다. 특히 한화그룹은 태양광 패널 관세와 관련해 행정부와 의회를 상대로 로비 활동을 했다. 미국에 태양광 공장을 운영하는 한화는 작년 미국 정부에 동남아시아에서 수입하는 태양광 제품에 관세를 부과해 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다. 한화는△ IRA △조선 △국방 예산에도 로비를 집중했다. 지난해 한화는 미국 조선업체 필리조선소를 인수했으며 미국 방산시장 진출을 타진하고 있다.
자동차·반도체 분야 투자 확대 영향
그동안 한국의 대미 투자는 2010년대만 해도 10위권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조 바이든 행정부에서 “미국 제조업을 살리겠다”며 2022년부터 IRA를 도입하자 한국 기업들은 미국에 대한 투자를 공격적으로 늘렸다. 전기자동차 배터리 등 각종 요건을 충족한 전기차에만 세액공제 혜택을 제공하는 IRA 규정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미국에 공장을 세우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에 기업들이 미국 투자를 확대한 것이다.
실제 현대자동차는 2023년 LG에너지솔루션과 손잡고 43억 달러(약 5조7,000억원) 규모의 전기차 배터리 공장을 미국 조지아주에 설립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삼성SDI도 한국에서 두 번째로 많이 투자한 인디애나주에 공장을 짓고 있다. 이곳에는 1,000명이 넘는 한국 교민과 6개의 한식당이 들어설 예정으로 알려졌다. 투자정보업체 fDI마케츠에 따르면 2023년 발표된 한국 기업의 대미 투자 계획 중 3분의 1 이상이 자동차나 전자 산업과 관련됐다.
또한 비슷한 시기 바이든 행정부가 도입한 반도체법도 한국 기업의 대미 투자를 늘린 요인으로 꼽힌다. 중국과의 반도체 기술 경쟁에서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미국 내 생산을 적극 장려하고자 만들어진 이 법에는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짓는 기업들에 520억 달러(약 69조원)의 보조금을 지급하는 내용이 담겼다. 이에 한국뿐 아니라 대만 등 각국의 반도체 업체들도 잇달아 미국에 공장을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韓, 2023년 대미 투자국 1위 등극
미중 간 긴장 고조가 이어지는 글로벌 정세 변화도 한국의 대미 투자 증가에 한몫했다. 중장기적인 판단에 따라 중국에 대한 비중을 줄이고, 미국의 비중을 늘리는 한국 기업이 늘어났다는 의미다. 2019년 한국의 대외투자액 가운데 미국이 차지하는 비율은 18%에 불과했지만, 2023년에는 50% 이상으로 급증했다. 반면 같은 기간 중국에 대한 한국 기업의 투자 규모는 전체 대외투자의 11%에서 1% 미만으로 쪼그라들었다.
이에 한국은 2023년 사상 처음으로 미국의 최대 투자국이 됐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에 따르면 한국은 2023년 215억 달러를 투자해 대미 최대 투자국에 등극했다. 2022년 1위를 차지했던 대만의 투자가 급감하면서 한국이 1위 자리에 올라선 것이다. 여기엔 TSMC 같은 대만 반도체 기업들이 최근 일본과 동남아 지역으로 투자를 다각화한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한국 다음으로는 캐나다가 2위에 올랐고 △독일 △영국 △일본이 뒤를 이었다. 중국의 경우 2014년 최대 대미 투자국이었지만, 2023년 투자액이 3분의 1로 감소하면서 8위를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