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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IT회사 차려 中으로 칩 유출 ‘수출 금지’ H100 등 3국 경유 수법 선전 일대서 엔비디아 칩 불법 수리 성업도

미국에 명목상의 IT 업체를 세우고 제3국을 경유하는 방식으로 중국에 엔비디아 인공지능(AI) 칩을 유출한 중국인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이번 사건은 중국의 AI 기술 발전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 정부가 수출 통제를 강화하던 중에 발생한 것으로, 이 같은 조치가 오히려 우회 경로를 활성화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중국 내에서는 밀반입된 칩을 활용한 데이터센터 구축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며, 불법 유통된 칩을 전문적으로 수리하는 신흥 산업까지 성업 중인 형국이다.
제3국 경유한 치밀한 밀수 수법
7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미 법무부는 중국 국적 겅촨(耿川·28)과 양스웨이(楊世爲·28)을 2022년 10월부터 지난달까지 미 상무부의 허가 없이 고성능 그래픽처리장치(GPU) H100을 비롯한 엔비디아 칩과 기술을 중국에 유출한 혐의로 기소했다. 2018년 제정된 미국의 수출통제개혁법(ECRA)에 따르면 전략적 기술과 군사적 민감 품목을 허가 없이 수출하면 최대 20년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다.
H100은 엔비디아의 주력 AI 칩으로 생성형 AI, 거대언어모델(LLM), 데이터센터, 고성능컴퓨팅(HPC) 등에 널리 쓰인다. 이들은 미국이 중국에 대한 기술 통제를 시작한 2022년 캘리포니아에 ALX솔루션이라는 명목상의 IT 업체를 설립했다. 이후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의 물류 회사를 경유해 중국으로 물건을 보내는 수법으로 최첨단 칩과 기술을 유출했다.
ALX솔루션은 2023년 8월부터 2024년 7월까지 미국 서버 제조업체 슈퍼마이크로 컴퓨터로부터 200개 이상의 엔비디아 H100 칩을 구매했으며, 고객이 싱가포르와 일본에 있다고 신고했다. 2023년 작성한 한 송장에도 구매자가 싱가포르에 있다고 적었는데, 싱가포르 현지 미 수출통제관은 해당 칩이 실제로 도착한 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고 명시된 주소에 회사가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들은 엔비디아 H100 외에도 중국 수출에 별도 허가가 필요한 PNY 지포스 RTX 4090 그래픽카드를 중국에 불법 수출한 혐의도 받는다. 해당 그래픽카드에는 엔비디아 칩이 탑재됐다. 미 상무부는 ALX가 20건 이상의 화물을 제 3국을 경유하는 방식으로 유출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물건은 말레이시아나 싱가포르로 보냈지만 구매 대금은 중국에서 흘러들어온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 1월 한 중국 회사로부터 100만 달러(약 14억원)를 수령했으며, 홍콩과 중국 소재 다른 기업들로부터도 추가 입금을 받았다. 수사 당국은 이 업체들을 운송 대행업체가 아닌 실제 구매처로 보고 있다.

밀반입 규모 최소 10억 弗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지난 5월부터 지금까지 약 3개월 만에 10억 달러(약 1조3,800억원) 상당의 플래그십 칩이 중국에서 거래된 것으로 파악된다. 5월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엔비디아 B200와 H100, AMD MI308과 같은 첨단 AI 칩은 물론, 중국 전용으로 수출되고 있던 성능이 다소 낮은 H20의 수출마저 금지한 시기다.
그러나 중국 유통업체들은 판매가 금지된 엔비디아 칩인 B200을 중국 AI 업체들의 데이터센터에 제공해 왔다. 또 다른 플래그십 모델인 H200도 중국에서 판매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복수의 소식통에 따르면 중국 내에서는 이들 칩을 사고파는 것 자체가 불법이 아니며 세금만 제대로 내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더우인, 샤오홍슈 같은 소셜미디어(SNS)에서는 B200 서버나 RTX 5090 등이 버젓이 판매되고 있으며, 일부 유통업체는 올해 출시 예정인 B300 칩까지 예약을 받고 있다. 한 중국 관계자는 엔비디아 칩을 구하는 것이 “수산시장에서 생선을 사는 것처럼 쉽다”며 “없는 것이 없다”고 전했다.
또한 중국에서는 이들 칩이 단일 제품뿐 아니라 서버 랙(칩 수십 개와 관련 부품을 통합한 형태)으로도 판매되고 있으며, 가격은 미국보다 약 50% 이상 높은 수준이다. 예를 들어 B200 랙 시스템은 8개의 칩과 관련 소프트웨어가 포함돼 있으며, 개당 약 300만~350만 위안(약 5억7,000만~6억7,000만원)에 거래되고 있다. 일부 판매자는 슈퍼마이크로 브랜드 박스를 통해 정품임을 강조하며 "즉시 사용 가능한 AI 인프라"로 홍보하고 있다.
수출 금지 칩셋 불법 수리도 성업
중국의 대규모 밀수 정황은 중국 내 AI 칩 수리 산업의 급성장을 통해 더욱 명확해진다. 로이터 중국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선전시를 중심으로 10여 개의 소규모 업체들이 엔비디아의 H100, A100 등 고성능 칩 수리 서비스를 전문적으로 제공하며 성업 중이라고 보도했다. 밀수된 칩들은 중국 내 데이터센터에서 24시간 가동되며 데이터를 처리한 결과 고장률이 높아져 최근 수리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업체는 수리 난이도에 따라 GPU 하나당 1만~2만 위안(약 190만~380만원)을 받고 한 달에 최대 200개를 수리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소프트웨어 테스트부터 회로기판 및 메모리 결함 수리, 부품 교체까지 광범위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로이터는 "지난해 말부터 수리 산업이 급성장한 것은 상당량의 엔비디아 칩이 중국으로 밀수됐다는 관측을 뒷받침한다"고 분석했다. 또한 입찰 자료를 인용해 중국 정부와 군 기관까지 금수 품목인 엔비디아 AI 칩을 구매한 정황이 있다고 전했다.
대다수 전문가들은 중국의 첨단 AI 칩 수요가 줄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수출이 재개된 저사양 H20 칩이 있지만, LLM을 훈련하는 기업들은 성능이 월등한 H100과 같은 고사양 칩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H100의 경우 2022년 출시도 전에 중국 수출이 금지됐다. 엔비디아는 이 같은 규제를 피하려고 H100보다 성능이 낮은 H20 칩을 제작해 중국에 수출해 왔는데, 미국은 지난 5월 관련 규제를 강화해 H20의 대중국 수출도 막았다가 지난달 트럼프 대통령이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와 면담 이후 중국 판매 재개를 허용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