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EU 무역 합의는 굴욕" 성난 EU 민심,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 사임론 힘 얻어
입력
수정
EU 회원국 국민 52%, 美-EU 무역 합의 부정적으로 평가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 역내 신뢰 잃어 수개월 만에 재차 불신임 투표 추진 나선 유럽 의회

유럽연합(EU) 시민 과반이 미국과의 관세 합의를 '굴욕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이번 합의가 유럽 경제에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부정적 인식이 확산한 것이다. 이에 더해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을 신뢰할 수 없다는 여론도 빠르게 힘을 얻어 가는 추세다.
美-EU 무역 합의는 '실패'였다?
9일(이하 현지시간) 영국 일간 가디언이 보도한 바에 따르면, 프랑스 싱크탱크 지정학연구그룹(GEG)의 정기간행물 르그랑콩티넝은 여론조사기관 클러스터17에 의뢰해 지난달 30일부터 지난 4일까지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폴란드 등 5개 EU 회원국에서 5,30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조사에 참여한 이들 중 52%가 미국과 EU의 무역 합의를 굴욕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22%는 관심이 없다고 응답했으며, 안도감과 자부심을 택한 응답자는 각각 8%, 1%에 불과했다.
이번 합의가 유럽 경제에 이익이 된다고 응답한 비율도 단 2%에 그쳤다. 반면 미국 경제에 이익이 된다는 응답은 77%로 압도적이었다. 무역 협상을 진행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도 높았다. 75%가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이 유럽의 이익을 '매우' 또는 '상당히' 나쁘게 방어했다고 평가했으며, 그를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41%)거나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31%)는 응답도 상당히 많았다. 사임에 찬성한 응답자도 60%에 달했다.
앞서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지난 7월 말 트럼프 대통령과 대부분 EU산 제품에 15% 관세를 부과하는 내용의 무역 합의를 타결한 바 있다. 또 3년 동안 7,500억 달러(약 1,044조9,750억원) 규모의 미국산 에너지를 구매하고 미국 경제에 6,000억 달러(약 835조9,800억원)를 투자하며, 400억 달러(약 55조7,320억원) 상당의 미국산 인공지능(AI) 칩을 구매하기로 약속했다.
7월에도 불신임 투표 진행돼
EU 내에서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형성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앞서 지난 7월에는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에 대한 불신임 투표가 진행되기도 했다. 처음 투표를 발의한 인물은 유럽 의회에서 극우 성향으로 분류되는 유럽 보수개혁연합(ECR)의 루마니아 출신 게오르게 피페레아 의원이었다. 그는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이 2021년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앨버트 불라 화이자 CEO(최고경영자)와 비공식적으로 수십억 유로 규모의 백신 계약 협상을 진행한 것을 문제 삼았다.
해당 계약이 막 체결됐을 당시에는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이 불라 CEO를 설득, 유럽에 필요한 백신 계약을 끌어냈다는 호평이 주를 이뤘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외신 등에서 구매 조건이 불투명하다는 지적이 쏟아져 나왔고, 일각에서는 백신을 지나치게 많이 구매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결국 사건은 EU 집행위원회의 투명성과 의사 결정 방식을 문제 삼는 방향으로 비화했다. 일부는 이 사건에 '화이자 게이트'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다만 폰데어라이엔 위원장 불신임안은 전체 720명 의원 중 533명이 참석해 절반이 넘는 의원들의 반대(360표)로 부결됐다. 찬성은 175표, 기권은 18표였다. 불신임안이 가결되려면 투표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던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결과가 나온 뒤 엑스(X·옛 트위터)에 “외부 세력이 우리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분열시키려 할 때, 우리의 가치에 따라 대응하는 것이 의무”라며 감사함을 표했다.

유럽 의회, 좌우 나란히 퇴진 압박
주목할 만한 부분은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의 불신임안이 부결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재차 유럽 의회 내에서 '폰데어라이엔 사퇴론'이 힘을 얻고 있다는 점이다. 유로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현재 유럽 의회 좌우 정치 그룹은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에 대한 불신임 투표를 각각 추진 중이다. 유럽의회 교섭단체 좌파(the Left) 대변인 토머스 섀넌은 "집행위원회가 노동자를 희생시키고 그린딜(녹색산업정책)을 파괴해 우리가 지향하는 모든 가치에 반하고 있다"며 불신임 발의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좌파는 굴복하지않는프랑스(LFI), 이탈리아 오성운동(M5S), 스페인 포데모스(Podemos) 등 급진 좌파 정당들이 만든 교섭 단체로, 전체 의석수는 46석이다. 이에 더해 녹색·유럽자유동맹(Greens/EFA) 소속 이탈리아 의원 4명도 좌파의 불신임 투표 발의에 동참하고 교섭단체 내에서 추가 서명을 모으는 중이다. 집행위원장 불신임 투표를 부치기 위해서는 유럽 의회 재적 720명 가운데 72명의 서명이 필요하다.
극우·강경 우파 모임인 유럽을위한애국자(PfE)도 불신임안을 따로 준비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프랑스 국민연합(RN)과 이탈리아 동맹(Lega), 헝가리 피데스(Pidesz) 등이 모여 결성한 PfE는 소속 의원이 85명이어서 다른 교섭 단체의 지원 없이도 독자적으로 불신임안 제출이 가능하다. PfE는 앞서 지난 7월 ECR이 주도한 불신임안에도 찬성표를 던졌다.
유럽 의회 규정에는 표결 이후 2개월 안에 새 불신임안을 발의하기 위해서는 재적 10% 아닌 20%(144명)의 서명을 받아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이에 따라 첫 표결은 재적 서명 요건이 원상복구되는 10월 중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다만 불신임 투표가 이뤄지더라도 찬성표가 탄핵 요건인 전체 투표의 3분의 2를 넘기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 폰데어라이엔이 속한 중도우파 유럽국민당(EPP)이 188석을 차지한 데다, 두 번째로 의석이 많은 중도좌파 사회민주진보동맹(S&D·136석)도 불신임에 부정적인 입장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