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바스 요구 고수한 푸틴, 트럼프 중재에도 우크라 평화협상 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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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 미·러 정상회담 결과 수용하지 않아
서방 평화유지군 주둔 두고 이견 여전해
美 중재에도 양측 설전 이어가며 평행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종전 조건으로 동부 돈바스 지역 전체 할양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 포기 등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존 영토 요구에서 한발 물러섰지만, 우크라이나가 절대 수용하지 않겠다고 고수해 온 핵심 요구는 그대로 유지했다. 우크라이나 역시 '돈바스를 포기하는 것은 생존을 포기하는 것'이라며 완고한 태도를 보이면서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다.
푸틴, 사실상 우크라의 비무장 중립국화 요구
21일(현지 시각) 로이터통신은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푸틴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돈바스(도네츠크·루한스크주) 전역을 넘겨주는 협상 조건을 제시했다고 보도했다. 이는 지난해 6월 돈바스는 물론 남부 자포리자·헤르손주까지 요구했던 안에서 일부 후퇴한 제안이다. 이와 함께 러시아는 점령 중인 자포리자·헤르손주에서는 현 전선을 동결하고 또 하르키우 등 다른 점령지 일부는 우크라이나에 돌려줄 수 있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현재 러시아는 돈바스 약 88%, 자포리자와 헤르손 약 73%를 장악하고 있다.
영토 외 다른 조건에 있어서도 양측은 여전히 평행선을 달렸다.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나토 가입 포기 △나토 동진 중단에 대한 법적 보장 △우크라이나군 전력 제한 △서방 평화유지군 주둔 불가 등을 평화협정의 전제 조건으로 고수했다. 사실상 우크라이나에 완전한 비무장 중립국화를 요구한 셈이다. '평화 중재자'를 자처한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 측이 우크라이나의 안전 보장을 수용했다며 3자 간 정상회담을 주선하겠다는 의지를 보였지만, 러시아가 여전히 완고한 태도를 보이면서 중재는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다.
젤렌스키 "돈바스 철수는 생존을 포기하는 것"
그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영토 포기 가능성을 일축해 왔다. 그는 “돈바스는 러시아의 추가 진격을 막는 요새”라며 “동부에서 철수하는 것은 국가의 생존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나토 가입 역시 헌법에 명시된 전략 목표인 만큼 러시아가 관여할 사안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푸틴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은 소셜미디어 엑스를 통해 "이미 분명히 밝혔듯 나토 평화유지군은 없다"며 "러시아는 그런 요구를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상회담을 두고도 양측의 설전이 이어졌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성명을 통해 “안전 보장의 윤곽이 합의되면 푸틴 대통령과 양자 회담을 할 수 있다”며 “회담 장소는 모스크바가 아닌 유럽의 중립국이 돼야 한다”고 밝혔다. 또 중국을 안전 보장의 보증인으로 참여시키자는 러시아의 제안에 대해 “중국은 전쟁을 막기 위해 우리를 돕지 않았고, 드론 시장을 개방해 러시아를 지원했다”며 거부했다. 그러자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어떤 문서에 서명하기 전에 임기가 끝난 젤렌스키 대통령의 정통성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신경전이 이어지자, 중재에 나선 트럼프 대통령은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트루스소셜에 두 장의 사진을 올렸다. 하나는 15일 알래스카 회동에서 자신과 푸틴 대통령이 함께 있는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1959년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과 니키타 흐루쇼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대화하는 장면이다. 두 사진 모두 미국 대통령이 러시아 측 수장을 가리키며 꾸짖는 듯한 구도가 공통점이다. 이어 그는 “침략국을 공격하지 않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하다”며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추가 공격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요새 벨트' 돈바스 할양이 종전 협상의 분수령
결국 종전 협상의 쟁점은 우크라이나의 안전 보장이다. 현재 미국과 유럽, 우크라이나는 3자 위원회를 구성해 영국·프랑스 등 유럽 주요국 군대가 우크라이나에 주둔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로이터통신은 “유럽이 우크라이나에 병력을 파견하되 미국이 지휘와 통제를 맡는 선택지가 논의되고 있다”며 “미국과 유럽 군 수뇌부가 우크라이나의 전후 안보를 위한 군사적 선택지를 각국 국가안보보좌관들에게 제시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반면 러시아는 서방 주도의 안보 보장을 거부하면서 사실상 러시아의 거부권과 영향력을 보장받으려 하고 있다. 라브로프 장관은 미국과 유럽이 주도하는 안보 협력과 관련해 "러시아가 배제된 상황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집단 안보 체제를 논의하는 것은 효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라며 "러시아는 중국,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주요국이 동등하게 참여해 우크라이나에 안전 보장에 대해 완전한 합의가 이뤄질 때 수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우크라이나의 안보 보장과 관련해 돈바스 할양이 협상의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도네츠크는 10년 넘게 이어진 양국 간 분쟁의 심장부로 이 지역 서부는 여전히 우크라이나가 장악 중이다. 러시아는 지난 3년 6개월간 이곳을 뚫으려 막대한 손실을 치렀지만, 매번 실패했다. 이곳 약 50㎞에 걸쳐 구축된 강력한 요새 벨트 덕분이다. 우크라이나로서는 가장 중요한 대러 방어선인 이곳을 내줄 경우 러시아의 추가 침공을 막기 힘들어진다.
이 요새 벨트는 북부 슬로비얀스크에서 시작해 크라마토르스크를 거쳐 남쪽으로 드루즈키우카·콘스티안티니우카까지 뻗어 있다. 러시아가 이곳을 점령하면 우크라이나에는 안보적 재앙이 초래된다. 전선이 서쪽으로 80㎞ 밀려나고 러시아군은 제2의 도시인 하르키우와 드니프로로 이어지는 진격로를 얻는다. 영토 양보와 안전 보장을 맞바꾸는 이번 협상에서 돈바스를 내주면 안보가 무너지고, 안 내주면 협상이 무산되는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