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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공장' 동남아의 진화 미국 中견제 속 공급망 재편 지정학 위험 적은 동남아 주목

주요 기업들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시아를 새로운 제조·수출 거점으로 삼으며 공급망 다변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미국의 대중 규제 강화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세제 혜택, 그리고 미·중 갈등에 따른 글로벌 생산기지 재편 흐름 속에서다. 낮은 생산비용과 외국 기업에 우호적인 정책, 거대한 자체 소비 시장을 보유한 동남아는 중국을 대신해 주요 공급망 허브로 자리매김하는 모양새다.
韓 첨단산업 전진기지로 부상
21일 산업계에 따르면 반도체 인쇄회로기판 제조기업 심텍은 최근 말레이시아 페낭에 고급 기판 공장을 준공했다. 페낭은 인텔·마이크론을 포함한 글로벌 팹리스와 반도체 패키징 기업이 몰린 허브로, 한국 중견 소재업체들이 동남아에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 역할을 한다. 투자 규모는 3억2,600만 링깃(약 1,080억원)으로 알려졌다. 이로써 심텍의 말레이시아 투자 규모는 총 7억5,000만 링깃(약 2,480억원)으로 불어났다.
배터리 산업에서는 현대자동차와 LG에너지솔루션이 인도네시아 카라왕에 현지 최초 배터리 셀 공장을 세웠다. 투자 규모는 총 11억 달러(약 1조5,300억원)며 올해 내 양산을 목표로 한다. 연산 10기가와트시(GWh)의 생산 물량 중 대부분은 한국·인도 전기차(EV) 시장으로 수출된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전기차 배터리 핵심 소재인 니켈 광산을 보유해 원재료 확보에도 유리하다.
철강·화학 업계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포스코는 베트남에서 냉연·열연 공장을 운영하며 동남아 수요를 흡수하고, 롯데케미칼은 말레이시아 타이탄케미컬 인수를 통해 석유화학 생산을 확대했다. LS일렉트릭도 베트남 박닌에 전력기기 공장을 세워 인근 국가 전력 인프라스트럭처 수요에 대응한다. 특히 베트남은 '베트남 플러스 원' 전략에 힘입어 제조업 허브로서의 지위를 공고히하고 있다. 그간 글로벌 공급망 재편의 핵심을 담당했던 차이나 플러스원에서 베트남 플러스원으로 전환된 것이다.

SAP·퀄컴·엔비디아도 동남아 진출
국내 기업들뿐 아니라 글로벌 기업들도 동남아에 거점을 구축하고 있다. 독일 소프트웨어 업체 SAP는 지난 7일 베트남 최대 도시 호찌민에 동남아시아 내 두 번째 연구개발(R&D)센터를 열었다. SAP는 향후 5년간 베트남 R&D센터에 1억5,000만 유로(약 2,400억원)를 투자할 예정이며, 현재 약 200명인 인력을 2027년 500명까지 늘릴 계획이다.
전사적자원관리(ERP) 시스템을 만드는 SAP는 4차 산업혁명 바람을 타고 급성장해 현재 유럽 주식시장 시가총액 1위에 올라 있다. 현재 독일, 중국, 캐나다, 인도 등 세계 각국에 20여 개 R&D센터를 두고 있으며 동남아에는 베트남에 앞서 싱가포르에 R&D센터를 개설했다. 사이먼 데이비스(Simon Davies) SAP 아시아태평양 대표는 "베트남은 과학, 기술, 수학 분야에서 빠르게 역량을 발전시키며 세계적인 인재 공급원으로 인정받고 있다"며 여러 나라 정부로부터 협력 제안을 받았지만 베트남이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미국 반도체 기업 퀄컴도 지난 6월 베트남에 자사 첫 동남아 R&D센터를 열고 AI 관련 연구를 진행 중이다. 세계 AI 반도체 선두 기업인 미국 엔비디아의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는 지난해 12월 베트남을 방문해 베트남 빈그룹 산하 AI 스타트업 빈브레인 인수와 현지 AI R&D센터 설립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값싼 인건비·반값 전기료, 제조업에 유리
기업들이 동남아로 눈을 돌리는 이유는 명확하다. 중국 대비 낮은 지정학적 리스크, 경쟁력 있는 인건비,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인한 낮은 무역 장벽, 젊고 교육 수준 높은 인구 구조 때문이다. 여기에 각국 정부는 첨단산업 유치를 위해 세제·인허가 혜택을 경쟁적으로 내놓고 있다.
먼저 동남아는 지정학적 리스크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베트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은 미·중 갈등의 직접적인 당사국이 아니어서 중국에 비해 수출 규제나 관세 충격이 덜하다. 특히 아세안 자유무역협정(AFTA)과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같은 다자 FTA를 통해 역내 교역 시 관세가 대부분 철폐돼 있어 아세안 회원국 간 무역 장벽은 여전히 낮다. 다만 최근 미국이 이들 국가에도 상호관세를 부과(베트남 약 46%, 말레이시아 약 24%, 인도네시아 약 32%)하면서 대미 수출에 추가 부담이 생겼다. 그럼에도 역내 시장과 제3국으로의 수출에서는 여전히 가격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평가다.
저렴한 인건비도 매력 요소다. 베트남 제조업 월평균 임금은 320달러(약 42만원)로, 중국의 절반 이하다. 인도네시아도 주요 산업군에서 한국 대비 인건비가 30~50% 이상 저렴해 대규모 인력 채용이 필요한 제조업에 유리하다. 베트남을 중심으로 단순 제조 인력뿐 아니라 코딩, 데이터 처리 같은 고급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인력도 빠르게 늘고 있다. 대학 진학률과 이공계 전공자 비중이 높아지면서 영어 소통이 가능한 젊은 전문인력 풀도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현지에서 단순 생산을 넘어 R&D·정보기술(IT) 서비스까지 아우르는 사업 운영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값싼 전기료 역시 큰 강점이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에 따르면 말레이시아의 산업용 전기요금은 킬로와트시(kWh)당 100원 안팎이며 일부 지방에서는 60~70원대로 내려가기도 한다. 말레이시아 역시 피크타임에는 kWh당 180원대 요금이 나오기도 하지만 주 정부 차원의 세제 인센티브와 산업 유치 정책 등으로 실제 이 같은 전기료를 내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게 현지 기업들의 전언이다. 인도네시아는 산업용 전기료가 kWh당 평균 22~100원으로 아세안 국가 중에서도 낮은 수준에 속한다. 베트남 역시 일부 지역은 60~70원대 전기료가 적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