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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사회 접어들며 긴축 일상화
과도한 선소비 전략에 지출 여력 감소
경제 성장 둔화 뚜렷, 현실 직시해야

인생 ‘100세 시대’가 목전에 다가온 가운데, 정작 국민들은 늘어난 수명만큼 소비하거나 미래를 낙관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많은 소비자가 꾸준한 경제활동을 하고 있음에도 실제 소비를 위해 지갑을 여는 일에는 소극적인 것으로 파악되면서다. 고령화는 물론, 불안정한 소득 구조와 경제 전반의 불확실성까지 맞물리면서 소비자들은 ‘미래는 더 나아질 것’이라는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기대수명 증가할수록 소비성향 하락
24일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평균소비성향(명목 GDP에서 민간소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48.5%로 집계됐다. 이는 2004년 52.1%에서 3.6%p 하락한 수치다. KDI는 전날 발표한 ‘인구요인이 소비성향에 미치는 영향과 시사점’ 보고서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KDI 20년간 평균소비성향 하락분 3.6%p 가운데 3.1%p가 기대수명 증가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봤다. 기대수명이 늘어날수록 가계는 그만큼 노후를 위해 저축을 늘리고 씀씀이를 줄인다는 분석이다.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지난 2004년 77.8세에서 2024년 84.3세로 6.5세 늘었다. KDI는 기대수명이 1년 증가할 때 소비성향은 평균 0.48%p 하락한다고 추산했다. 앞으로도 기대수명은 꾸준히 늘어나는 만큼 2034년 평균소비성향은 46.3%까지 하락할 전망이다.
한편, 인구 고령화에 따라 75세 이상 초고령층 인구 비중의 증가는 도리어 소비성향을 높이는 것으로 파악됐다. 초고령층 인구는 여생이 길지 않다는 인식에 보유한 자산을 남김없이 소진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KID는 “다만 초고령층 인구 증가 폭보다 기대수명의 증가가 소비 행태에 미치는 영향이 압도적으로 커 평균소비성향 하락세를 꺾진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에 KDI는 소비를 북돋는 제도 개선이 절실하다고 제언했다. 고령 인구의 일자리를 늘리고, 그만큼 씀씀이를 늘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김미루 KDI 연구위원은 “노령층의 노동시장 참여를 제약하는 사회 구조적 요인을 해소하는 게 최우선 과제”라며 “연공서열형의 임금구조를 개선하고, 정년퇴직 후 재고용 제도를 활성화하는 것도 적극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령화를 넘어선 구조적 문제
전문가들은 지금의 소비 위축이 단순히 고령화 때문만은 아니라고 입을 모았다. 코로나19 팬데믹 직전까지만 해도 우리 정부와 시장은 저금리 정책, 부동산 경기 부양, 각종 세제 혜택 등을 통해 국민의 ‘미래 소비’를 끌어왔고, 그 결과 많은 가계가 소득 대비 지출을 과도하게 앞당기는 구조에 익숙해졌다는 진단이다. 이 같은 내수 부양책을 통해 일시적으로 경기는 살아날 수 있지만, 가계의 저축 여력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관된 지적이다.
실제로 2000년대 이후 한국 경제는 수출보다 내수를 살리는 데 주력해 왔다. 역대 정부는 소비 활성화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자동차, 가전, 전자기기 등 고가 소비재를 중심으로 각종 프로모션과 세금 감면 혜택을 제공했다. 청년층은 신용카드를 사용한 할부 구매에 익숙해졌고, 중장년층 사이에선 대출을 통한 부동산 투자가 유행처럼 번졌다. 문제는 이 모든 소비 행위가 ‘미래 소득은 지금보다 나을 것’이라는 전제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같은 전제가 실현되지 않으면, 소비 기반도 흔들리는 구조다.
통계청에 의하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3만6,624달러(약 5,239만원)로 집계됐다. 한국의 GNI는 2014년 3만798달러로 3만 달러를 돌파한 이후 10년째 3만 달러대에 머물고 있다. 이 기간 1인당 GNI 증가율은 18.9%에 그쳤다. 반면 씀씀이는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전체 소비지출을 총인구로 나눈 1인당 민간소비지출은 2014년 1,649만원에서 2024년 2,387만원으로 44.7% 증가했다.
기대한 만큼의 소득 증가가 실현되지 않으면서 불안정한 고용, 양극화된 자산 구조, 지속되는 경기 침체는 고스란히 가계에 전가됐다. 특히 베이비붐 세대 이후 퇴직자들은 충분한 자산을 축적하지 못한 채 긴 노후를 마주하게 됐다. 일부 퇴직자는 단기 일자리를 통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소비 주체로서의 역할을 기대하긴 어려운 실정이다. 고령화와 가계 부채 증가라는 구조적 위기가 비소비 인구의 증가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본격화한 모습이다.

정년 연장·내수 진작책 정답 아닐 수도
이 같은 소비 절벽은 미국 등 주요국과 비교하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KDB미래전략연구소의 조사에서 2023년 기준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민간소비 비중은 49.9%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국 중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미국(67.9%)과 비교하면 3분의 2를 겨우 넘는 수준이며, OECD 평균(60.4%)과 비교해도 한참 낮은 수치다. 또 2001년부터 2024년까지 실질 GDP의 연평균 증가율이 3.46%에 달한 데 반해 실질 소비의 연평균 증가율은 2.57%에 그쳤다. 민간소비 증가율이 GDP 증가율의 74% 수준에 불과했던 셈이다.
전문가들은 민간소비 회복을 가로막는 구조적 제약 요인으로 △저출산·고령화 및 잠재성장률 하락 △노후 대비용 저축 증가에 따른 소비성향 하락 △높은 가계부채 비중에 따른 원리금 상환 부담 확대 △경제 형편 취약한 1인 가구 증가 등을 꼽았다. 함인희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현재 3·40대는 자신들은 부모를 부양했으나, 자녀들로부터 외면당한 부모 세대의 불행과 좌절을 목격한 이들”이라면서 “이들은 세대 학습효과를 통해 자신의 노후를 준비하고자 현재의 소비를 희생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성장을 고집하기보다는 축소되는 경제 규모에 맞는 사회 시스템을 준비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는 조언도 나온다. 줄어드는 경제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지속 가능한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국회 예산정책처는 매년 하반기 발간하는 ‘중기경제전망’ 보고서를 통해 “재정지출 확대를 통한 정부정책이 가계 소득 증대로 이어지고, 민간소비 개선요인으로 작용하는 건 매우 제한적”이라며 “65살 이상 취업자 수가 꾸준히 증가하는 만큼 노인 고용 증가가 실질적인 사업소득 및 근로소득 증가로 이어질 방안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