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수정
UN 러 규탄 결의안 채택, 美 반대표 던져 트럼프, 푸틴과 협력 논의하며 우크라 압박 英·佛 등 유럽과의 '가치 동맹' 균열 조짐

미국이 UN(국제연합) 총회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를 규탄하는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졌다. 적대적 행위의 종식을 강조하면서도 러시아를 직접적으로 겨냥한 표현은 피하며 사실상 러시아를 두둔하는 행보를 보인 것이다. 오히려 중국·러시아·북한 등 과거 적대국으로 규정했던 나라들과 입장을 같이하며 전통적 동맹인 유럽과는 대립각을 세우는 모습이다. 또한 러시아와 국방비 삭감을 비롯해 공동 개발 사업을 긴밀히 논의하면서 우크라이나에 대해서는 5,000억 달러 규모의 광물 협정 체결을 압박하는 등 세계 질서에 큰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美, UN 총회서 노골적인 '러시아 편들기'
24일(현지시각) UN은 미국 뉴욕 UN본부에서 긴급회의를 열어 우크라이나가 전쟁 발발 3년을 맞아 발의한 우크라이나 전쟁 관련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날 우크라이나와 미국 대표는 각각 결의안을 제시했는데 우크라이나 측은 결의안을 통해 우크라이나 전쟁을 '러시아의 전면적인 침략(aggression)'으로 규정하고 '포괄적이고 정의롭고 지속 가능한 평화'를 요구했다. 또한 "러시아는 모든 군 병력을 즉시, 완전히 철수해야 한다"고 명시해 이전 UN 총회 결의의 이행 필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미국 대표부는 "러시아를 규탄하는 표현에 반대한다"며 자국이 준비한 결의안을 공개했다. 미국은 결의안에서 "분쟁은 신속히 종결돼야 한다"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항구적 평화를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겉으로는 적대행위의 종식을 강조한 것처럼 보이나 '러시아의 침략'이라는 표현은 피하고 우크라이나의 영토 보전에 관한 내용은 빼면서 사실상 러시아를 두둔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날 두 국가의 설전 끝에 UN 총회는 우크라이나의 결의안을 표결에 부쳤고 176개 회원국 중 유럽 주요국을 비롯한 총 93개국의 찬성으로 채택됐다. 반대와 기권은 각각 18표, 65표로 집계됐다. 미국은 러시아, 북한, 벨라루스 등과 함께 반대표를 던졌고 중국은 반대표 대신 기권표를 행사했다. 반면 미국 측 결의안은 대부분의 국가가 미국에 등을 돌리면서 부결됐다. UN 총회 결의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와 달리 회원국에 대한 구속력은 없지만, UN의 공식 입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상징적 의미가 있다.
총회 후 열린 안보리에서도 미국은 러시아와 같은 편에 섰다. 이날 미국은 안보리에도 러시아의 침공에 대한 책임 추궁은 뺀 채 신속한 전쟁 종결을 촉구하는 내용만 담은 결의안을 제출했고, 15개 이사국 중 미국, 러시아, 중국 등 10개국이 찬성하며 채택됐다. 유럽은 이 같은 미국의 행보에 비판 수위를 높였다. 프랑스는 "러시아의 침략이 보상받는다면 어디에도 평화와 안전은 없을 것"이라고 반발했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미국 대통령이 민주주의가 아닌 독재가 안전한 세계를 만들고 있다'고 우려했다.

對러시아 제재 두고도 유럽과 다른 행보
UN 총회와 안보리 상임이사국 회의에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노골적으로 러시아를 편들고 나서자 일각에서는 그동안 '가치 동맹'을 강조해 온 미국과 유럽이 분열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실제로 미국과 유럽은 우크라이나 전쟁은 물론 대러시아 제재를 두고도 서로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24일 유럽연합(EU)은 제16차 러시아 제재 패키지를 승인했다. 향후 12개월간 러시아산 알루미늄 수입을 전년도 수입량의 80%로 제한하고 2026년 말부터는 전면 금지한다는 내용이다. 이와 함께 러시아산 원유 등 에너지 부문을 겨냥한 추가 제재도 부과했다.
반면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와의 협력 가능성을 거론하며 기존의 외교 노선을 완전히 뒤집었다. 그는 24일 자신의 소셜미디어(SNS) 트루스소셜을 통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전쟁 종식을 비롯해 양국 간 주요 경제 개발 거래를 논의 중"이라고 밝혔다. 푸틴 대통령도 "미국 등 다른 파트너국과 희토류를 함께 개발할 준비가 됐다"며 "특히 알루미늄 부문에서 미국과의 공동 개발 사업을 고려할 수 있다"고 화답했다. 앞서 13일 트럼프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과의 통화 사실을 언급하며 "우크라이나, 중동, 에너지, AI, 달러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논의했다"고 밝힌 바 있다.
양국은 조만간 국방비 삭감에 대한 논의도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24일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국영방송 VGTRK 인터뷰에서 "미국, 러시아, 중국이 모두 국방비를 절반으로 줄여야 한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제안은 좋은 생각"이라며 "러시아는 미국과 국방비 삭감을 논의할 준비가 됐다"고 말했다. 미 국방부는 이미 향후 5년간 매년 8%씩 예산을 감축하기로 했다. 러시아 역시 우크라이나 전쟁 기간 국방비를 지속 증액해 온 만큼 감축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푸틴 대통령에 따르면 지난해 러시아의 국방비는 GDP(국내총생산)의 8.7%에 이른다.
美 압박 속에 우크라 광물협정도 체결 임박
한편 미국은 러시아와 달리 우크라이나에 대해서는 압박을 이어가고 있다. 그동안 우크라이나는 트럼프 행정부가 자국을 계속 지원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희토류 등 우크라이나의 천연자원을 함께 개발하는 내용의 경제협력 방안을 제시해 왔다. 그러나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제시한 협정문의 첫 초안에는 우크라이나가 원했던 안보 보장에 관한 내용이 없었고, 이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서명을 거부했다. 그러자 트럼프 대통령은 젤렌스키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맹비난하면서 우크라이나가 협정에 합의할 것을 압박하고 있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지난 21일 자로 다시 작성된 두 번째 협정문 초안에는 우크라이나가 광물, 가스, 원유 등 천연자원 지분 5,000억 달러를 비롯해 항만과 다른 기반 시설에서 창출하는 수입의 절반을 미국에 넘긴다는 내용이 담겼다. 협정 체결 이후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지원할 경우 우크라이나는 지원금의 두 배를 기금에 적립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NYT는 지난해 우크라이나의 천연자원 수입이 11억 달러(약 1조6,000억원)에 불과했던 점을 지적하며 "5,000억 달러 규모의 자원 이전은 미국이 지금까지 우크라이나에 지원한 금액의 4배를 초과한다"고 전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압박과 친러 행보 속에 우크라이나도 협정을 체결하는 쪽으로 기우는 분위기다. AP통신에 따르면 젤렌스키 대통령은 지난 23일 기자회견에서 "우크라이나 국민이 10세대에 걸쳐 갚아야 할 협약에 서명하지는 않을 것"이라면서도 "만약 미국이 '협정에 서명하지 않으면 지원하지 않겠다'는 조건이라면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가 협정을 강요받고, 그것 없이는 버틸 수 없다면 결국 서명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오늘 저녁 부로 5,000억 달러는 더 이상 논의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사실상 체결 가능성을 시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