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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속 완화→철회→임시 허가 검토 트럼프 "농부가 직접 판단해야" 현장 노동력 부족 우려에 방향 조정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특정 산업에 종사하는 이민자들을 위한 ‘임시 노동허가제’를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강경한 이민 단속 기조 속에서 농장과 외식업계 등 현장 노동력 부족 우려가 커지자 일부 유연성을 허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조정한 것으로 풀이된다.
농업 분야 외국 근로자 대상 '임시 고용 허가제' 실시
지난달 30일(이하 현지시각) NBC뉴스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이민자들이 세금을 내고 농부들이 어느 정도 통제권을 가질 수 있는 일종의 임시 허가를 줄 것"이라며 "우리는 현재 그 작업을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현재는 15년, 20년 동안 일해 온 좋은 사람들을, 당국이 불법 입국했을 가능성이 있으면 농장에서 다 데려가고 있다"며 "농장에서 하는 일은 힘 일이며 다른 사람들이 잘 하려 하지 않는데 그런 사람들을 다 데려가 농부를 파산시키는 건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우리는 농부들을 위해 뭔가를 할 것이고, 농부가 직접 판단하게 해야 한다"며 "다만 살인범을 고용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국토안보부(DHS) 대변인도 백악관이 이달 초 특정 산업 분야에서 이민 단속을 완화하는 방침을 철회한 후 밝혔던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DHS는 성명에서 "대통령은 매우 분명히 입장을 밝혀왔다. 폭력 범죄자를 숨기거나 이민세관단속국(ICE)의 활동을 방해하는 산업에는 안전지대가 없을 것"이라며 "현장 단속은 공공안전, 국가안보, 경제안정을 위한 핵심 전략이다. 이는 미국 노동자를 해치고 노동시장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불법 고용 네트워크를 겨냥한 것"이라고 밝혔다.
'오락가락' 이민 정책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발언은 지난달 ICE가 농장·식당·호텔 등 산업현장의 단속을 일시 중단했다가 다시 재개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나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12일 자신의 소셜미디어(SNS) 트루스소셜을 통해 “농장과 호텔 산업계에서 숙련된 장기 근로자들이 추방 위기에 놓였다고 호소했다”며 “우리는 농부를 보호해야 한다. 변화가 올 것”이라고 예고한 바 있다. 실제 NBC뉴스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는 당시 잠시 농장·호텔·요식업계에서의 체포를 유예했으나 며칠 만에 방침을 철회하고 단속을 재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4월에도 불법 체류 중인 이민자들이 농장과 호텔에서 계속 일할 수 있도록 했다가 합법적으로 재입국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힌 바 있다. NBC뉴스는 당시 행정부 내부 관계자를 인용해 트럼프 대통령이 H-2A, H-2B 비자 프로그램 개편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민자 단속에 대해 오락가락 행보를 보이는 건 이들을 고용해 왔던 미국 내 업체들이 인력 부족으로 인한 어려움을 강하게 호소했기 때문이다. 특히 미 외식업계에선 이민자 노동력이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전미레스토랑협회(NRA)에 따르면 미국 내 외식업 노동자 5명 중 1명이 외국 국적이다. 이 중 상당수는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지만, 정당한 서류를 확보하지 못한 이민자 약 100만 명도 업계에서 일하고 있다.
업주들은 트럼프 행정부가 이민자 수천 명이 갖고 있던 미국 내 합법적 지위를 취소하는 등 단속을 강화하면서 고용 상황이 악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합법·불법 이민자 모두 체포·추방에 대한 공포가 커져 섣불리 노동 시장에 나서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메릴랜드에서 5개의 식당을 운영 중인 토니 포어맨은 파이낸셜타임스(FT)에 “일부 직원들은 무서워서 아예 출근을 꺼리는 상황”이라며 “이런 일자리를 원하는 이들이 늘지 않고 있다. 자격을 갖춘 직원을 찾는 게 힘들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 입맛 따른 선·악 구분
이민자를 정부 입맛에 맞게 ‘갈라치기’ 하는 방식도 도마에 올랐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4월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현재 정부는 “살인범”들을 미국 밖으로 내보는 데 주력하고 있다며 다른 불법 이민자에 대해선 “자진 추방 프로그램”을 도입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그들에게 돈을 좀 주고 비행기표도 줄 것”이라며 “만약 그들이 선한 사람이고, 우리가 그들이 돌아오길 바란다면 가능한 한 신속하게 데려오려고 노력하겠다”고 했다. 불법으로 체류 중인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떠났다가 합법적 허가를 받아 다시 미국에 돌아오길 바란다는 취지다.
트럼프 대통령은 특히 미국의 호텔과 농장이 필요로 하는 노동자를 구할 수 있게 돕고 싶다고 말했다. 현재 미국의 농업과 서비스업이 이민자가 제공하는 저임금 노동력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한 발언으로 해석된다. 이에 대해 AP통신은 불법 이민자를 범죄 집단으로 몰아가며 대규모 추방을 공약해 온 트럼프 대통령의 강경 기조와 온도 차가 있는 발언이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자진 출국’은 트럼프 정부가 밀어붙이는 반이민 정책의 핵심 중 하나로 꼽힌다. 미 공영방송 NPR에 따르면 트럼프 정부는 대규모 추방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임시체류 허가를 받은 이민자에게 합법적으로 부여된 사회보장번호(SSN)를 박탈하는 동시에, ‘자발적으로 떠나라’는 메시지를 강조해 왔다. 미국에서 버티면 험한 꼴을 겪을 수 있다는 공포감을 조성하면서 스스로 떠나면 언젠가 미국에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구슬리는 셈이다.
또한 트럼프 정부는 출범 직후 조 바이든 전임 정부가 고안한 미 세관국경보호국(CBP)의 이민 사전 인터뷰 예약 애플리케이션 ‘CBP 원(One)’을 종료하고, 앱 명칭을 ‘CBP 홈(Home)’으로 바꿔 자발적 출국 의사를 전하는 통로로 바꾸기도 했다. 시민단체 이민자가족보호연합은 “이민자들은 트럼프 정부의 수사적 주장을 알아차릴 만큼 현명하며 ‘떠나면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나아가 합법적 체류 지위를 갖췄는데도 ‘행정상 오류’로 추방된 엘살바도르 국적 이민자를 아무 근거 없이 “테러리스트이자 MS-13 갱단원”이라고 우기고 있는 트럼프 정부의 행태를 보면 ‘자진 출국 이후 합법적 재입국 가능’이란 주장의 신뢰도는 떨어진다. 미 연방대법원은 트럼프 정부가 지난 4월 15일 범죄 조직원으로 지목해 엘살바도르 수용소로 추방한 킬마르 아브레고 가르시아에게 범죄 전력이 전혀 없다며 미국으로 송환해야 한다고 판단했지만 트럼프 정부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