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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뿐 아니라 美에 대한 기술 리스크도 제거 필요" 中 기술 수용하지 않으면서 美 빅테크 사용 높아져 유럽·아시아 주요국, 독자적 기술력 확보에 집중

미국의 동맹국들이 중국 기술 의존도를 줄이는 데 집중해 왔지만, 미국 기술에 대한 의존도 역시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왔다. 미국이 글로벌 리더에서 자국 이익을 우선시하는 '거래적 강대국'으로 변모함에 따라 동맹국들은 양대 기술 강국 모두에 대한 의존도를 재고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유럽 등 주요국, 美 빅테크에 핵심 인프라 다수 의존
15일 정보통신(IT)업계에 따르면 유럽과 아시아 등 미국의 주요 동맹국에서 미국에 대한 기술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일례로 지난해 11월 독일 검색엔진 에코시아(Ecosia)와 프랑스 검색엔진 콴트(Qwant)는 합작법인(JV) EUSP(European Search Perspective)의 설립에 합의하고, 올해 상반기 중 서비스를 출시하기로 했다. 양사는 "미국 빅테크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유럽의 독자적인 검색 인덱스 구축하기 위해 합작법인을 설립한다"며 "이 검색엔진은 보다 개선된 독일어·프랑스어 서비스 제공을 목표로 한다"고 밝혔다.
각국 인공지능(AI)업계도 미국 빅테크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소버린 AI' 전략을 강화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네이버가 한국어에 특화된 생성형 AI를 기반으로 검색·지도·쇼핑 등 서비스 전반을 통합하는 '온 서비스 AI' 전략을 추진 중이며 KT와 LG도 한국형 AI 모델을 선보였다. 일본과 대만의 주요 IT 기업들도 자국어와 문화에 최적화된 AI 모델 개발에 적극 투자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정부 차원에서 아랍 문화와 언어를 지키기 위해 데이터인공지능청(SDAIA)를 설립하고 국부펀드의 투자를 확대하는 등 소버린 AI 생태계 구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처럼 미국 중심의 기술 패권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확산하는 가운데 전문가들은 미국 기술 의존이 가져올 구조적 위험성에 주목하고 있다.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RIIA) 윌리엄 매튜스 선임연구원은 "미국의 동맹국이 미국에 기술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중국에 대한 의존보다 훨씬 더 큰 위험을 초래할 것"이라며 "동맹국들이 미국의 견제 속에 중국 기술을 수용하지 않은 상황에서 마이크로소프트(MS)의 오피스 소프트웨어, 아마존 웹 서비스, 비자 결제 시스템과 같은 핵심 기술 인프라 대부분을 미국 기업에 의존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그는 미국의 위성 회사 맥사르(Maxar)의 사례를 언급했다. 지난 3월 맥사르는 미 행정부의 결정에 따라 국가지리정보국(NGA) GEGD(Global Enhanced GEOINT Delivery) 프로그램을 통해 우크라이나에 제공되던 고해상도 위성 영상에 대한 접근을 차단했다. 해당 영상은 우크라이나군의 드론 작전·표적 식별·전장 분석에 핵심적으로 활용돼 왔다. 이에 대해 메튜스 연구원은 "미국 기술 의존의 위험성을 전 세계에 알린 사례"라며 "안보와 자율성 보장을 위해 중국 리스크 제거가 필요한 것처럼 미국 기술에 대한 조치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크라우드스트라이크 사태로 초연결 취약성 드러나
특히 지난해 7월 전 세계 항공·의료·금융·물류·행정 등 수많은 인프라를 마비시킨 초유의 'IT 대란'은 MS 등 미국 빅테크에 의존하는 초연결 시대의 취약성을 고스란히 드러낸 것으로 평가된다. 작년 7월 19일 글로벌 보안기업 크라우드스트라이크(CrowdStrike)의 엔드포인트 보안 솔루션 팰컨 센서(Falcon Sensor) 업데이트에서 오류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전 세계 850만 대 이상의 윈도우 기기에서 블루스크린 오브 데스(BSOD)가 발생했다. BSOD는 업데이트 결함으로 해당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던 PC 화면이 갑자기 파랗게 변하는 현상을 말한다.
사건 발생 1시간 20분 만에 보완 조치를 완료한 크라우드스트라이크는 오류의 영향을 받은 기기 비율이 전체 윈도우 기기 중 1% 미만에 불과하다고 발표했지만, BSOD 현상이 발생한 PC를 일일이 수작업으로 다시 시작해야 하는 탓에 복구 작업은 더디게 진행됐고, 항공사·은행·방송사 등 주요 인프라에 광범위한 피해를 초래하며 사회적 혼란이 확산됐다. 결함은 MS의 클라우드 서비스 애저(Azure)의 윈도우 서버에도 영향을 미쳤고 이로 인해 애저 기반의 나비테어(Navitaire) 예약·발권 시스템을 사용하는 여러 항공사들이 연쇄 피해를 입었다.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은 크라우드스트라이크에 있었으나, 다수의 기업들이 MS의 클라우드 시스템을 사용하는 상황이 피해 규모를 키운 것이다.
당시 이를 두고 MS는 "이번 사태로 클라우드 공급업체·소프트웨어 플랫폼·보안 공급업체와 고객사가 하나로 연결된 생태계가 확인됐다"고 했고 리나 칸 당시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 위원장은 "단일 기업에 대한 기술 집중이 어떻게 취약한 시스템을 만들 수 있는지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MS의 독과점 등에 관한 규제 논란은 AI 등 신기술 분야에서의 확장과 함께 전 세계적으로 쌓여가고 있다"고 짚었다.
美 역시 반도체 등 전략사업에서 해외 기술에 의존
이 같은 기술 의존 구조는 비단 미국 동맹국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 역시 핵심 전략 산업에서 해외 기술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특히 반도체 분야는 동아시아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대표적인 산업이다. 한국 삼성전자와 대만 TSMC가 전 세계 고성능 반도체 생산을 주도하는 가운데 미국은 반도체 수입의 40% 이상을 아시아에 의존한다. 특히 첨단 3나노미터(nm) 이하 공정은 대만에 생산이 집중돼 있어 양안 갈등 등 지정학적 리스크가 확대될 경우 반도체 공급망이 붕괴되면서 국가 안보 차원의 위기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기술적 동반자이자 경쟁자인 유럽에 대해서도 높은 수준의 의존도를 보인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산업 기반 강화를 위해 생산설비 현재화를 강조해 왔는데, 설비의 상당 부분은 독일로부터 수입되고 있다. 최근 유로화 대비 달러화 약세로 독일산 제품 가격이 상승하고 미 정부의 관세 부과까지 겹쳤지만, 독일의 대미 기계 수출은 여전히 견조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독일기계제조업협회(VDMA)는 “자동화 및 디지털화 분야에서 미국 기업들의 투자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으며, 이 분야의 기술력을 보유한 독일 기업들이 주요 수혜를 입고 있다”고 설명했다.
반도체 장비 분야에서는 네덜란드 ASML에 대한 의존도 리스크가 꾸준히 제기된다. 특히 첨단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극자외선(EUV) 리소그래피 장비는 ASML이 독점 공급하고 있어, 미국의 대중국 수출 규제에서도 핵심 수단으로 활용됐다. 재생에너지 분야에서도 유럽 기술에 대한 의존이 뚜렷하다. 덴마크 베스타스(Vestas)와 독일 지멘스(Siemens)의 해상풍력 기술은 미국 내 발전 설비의 30% 이상을 차지한다. 의료 산업 또한 독일, 스위스, 일본 등에 필수 의료 장비를 크게 의존하면서 팬데믹 당시 마스크·진단키트·인공호흡기 등의 수급 불균형이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