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갭투자 주택 전세대출도 막혀 전액 현금으로 보증금 내야 집주인은 잔금 못 내 '발동동'

입주가 진행 중인 분양 단지에서 집주인이 전셋값을 크게 내려도 세입자가 전세를 들어가지 못하는 기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정부가 분양 시기에 관계없이 지난달 28일 전까지 전세 계약을 체결하지 않았다면 소유권 이전 조건부 전세대출을 내주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세입자 보증금으로 잔금을 치르려 했던 집주인들이 서둘러 전셋값을 조정하고 있지만, 세입자들은 대출이 나오지 않아 입주가 어려운 상황이다.
'소유권 이전 조건부 대출' 금지, 입주 앞두고 대출 막혀
4일 부동산업계에 따르면 수도권에서는 지난달부터 서울 서초구 메이플자이, 동대문구 휘경자이 디센시아, 경기 안양시 평촌두산위브더프라임 등 약 2만 가구 입주가 진행되고 있다. 이미 전세 계약을 체결한 집주인은 이번 대출 규제에서 제외됐으나, 아직 세입자를 구하고 있는 집주인은 규제 직격탄을 맞게 됐다. 정부가 갭투자를 차단하겠다며 소유권 이전 조건부 전세대출을 전면 금지한 까닭이다. 즉 세입자 보증금으로 분양 잔금을 낼 경우 세입자가 전세대출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금융위원회는 지난달 28일부터 수도권·규제 지역 내 주택 구입 목적의 주택담보대출 최대한도를 6억원으로 제한하고, 주택 구입 목적의 주담대 실행 시 '6개월 이내' 전입 의무를 부과했다. 다주택자에 대한 주담대가 제한되고, 생애 최초 주택담보대출비율(LTV) 규제는 종전 80%에서 70%로 축소됐다. 수도권·규제 지역 내 생활안정자금 목적의 주담대 한도는 '1억원'으로 제한하고, 소유권 이전 조건부 전세대출도 금지한다. 갭투자를 막고 실수요자 중심의 대출 실행을 위해서다. 신용대출은 '연 소득 이내'로 제한된다.
세입자가 전액 현금으로 보증금을 조달한다면 보증금으로 잔금을 납부할 수 있지만, 서울 주요 지역은 전셋값이 워낙 높아 대부분 전세대출을 받아야 하는 형편이다. 메이플자이는 전용면적 59㎡(25평)의 융자 없는 전세 물건 시세가 약 11억원으로 형성돼 있다. 휘경자이 디센시아 전용 59㎡(25평)는 시세가 5억원 내외다.
다급해진 집주인들은 우선 전셋값을 낮추는 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메이플자이는 대출 규제가 발표된 지난달 27일 이후 전셋값을 1억원 이상 낮춘 물건이 다수 나오고 있다. 신반포4지구(메이플자이) 재건축 조합장은 "입주 기간을 입주일로부터 60일로 정했는데, 분양 계약자와 조합원들 사이에서 기간을 더 늘려달라는 요청이 오고 있다"며 "갑작스러운 정부 규제로 잔금 납부가 어려워진 집주인이 많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집주인이 전셋값을 낮춰도 대출이 나오지 않아 전세를 구할 수 있는 세입자가 많지 않다는 점이다. 동대문구 이문동 한 공인중개사는 "신축 아파트에 입주하고 싶어 하는 전세 수요는 여전히 많다"면서도 "대출이 나오지 않아 전셋값이 낮아져도 전세 계약이 이뤄지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규제 발표 후 바로 다음 날 시행, 대출창구 '혼선'
은행들도 혼란스럽긴 마찬가지다.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당국이 지난달 27일 대출 규제 강화안을 발표한 뒤 별도의 유예 기간 없이 곧바로 다음 날인 28일부터 곧장 시행되면서 은행 대출 상담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 특히 큰 틀에서의 규제 발표 이후 전세퇴거자금 대출, 이주비 대출 등 세부 적용을 어떻게 할지를 문의가 쏟아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금융당국은 지난달 30일 "제도 시행 전인 6월 27일까지 계약금을 냈거나 은행 전산상 대출 신청 접수를 완료했다면 종전 규정을 적용받는다"며 안내에 나섰지만, 은행권에서는 세부적인 가이드라인이 추가로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분위기다. 한 은행 고위 간부는 "규제 이후 대출 실행 한도가 한정적인 데다 규제 적용이 애매한 사례들이 지속해서 나오면서 평소보다 대출 상담을 위한 대기 시간이 길어질 수 있다"며 "가계대출 실무자들이 은행 자체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사례들을 모아 금융당국에 세부 가이드라인을 요청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은행들이 하반기 절반으로 줄어든 '대출 총량 규제'를 준수하려면 대출을 원활히 받지 못하게 되는 것 아니냐는 불안 심리도 상당하다. 실제로 대출모집인을 통한 대출 한도는 이미 8월분까지 대부분 소진된 상태다. 최근 부동산 커뮤니티 등에서는 국민·신한·하나·우리·농협 등 5대 시중은행의 이름과 함께 "7~8월 실행분 담보대출 접수 마감"이라는 글이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영업점 주담대는 정상적으로 접수 중이지만 대출 상담이 상당수 지연되고 있는 데다, '대출 모집인'을 통한 접수가 아예 중단된 은행도 있다. 대출 모집인은 은행과 계약을 맺고 대출 희망자와 은행을 연결해 주는 법인 또는 상담사를 말한다. 통상 은행권 신규 주담대 중 50%가량은 대출모집인을 통해 이뤄진다.
농협은행과 신한은행은 7월 실행분까지 모집인 주담대 한도가 소진돼 접수가 중단된 상태며, 우리은행은 8월분까지 일부 모집인의 한도가 소진됐다. 한화생명을 비롯한 일부 보험사도 8월분까지 주담대 신규 접수가 불가능한 상태다. 모집인 대출 한도가 소진됐다고 해서 주담대 자체가 중단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출 규제에 따른 불안 심리는 한동안 지속될 전망이다.

카드론도 규제 대상, 취약차주 대부업·불법사채 내몰릴 수도
저축은행 사정도 다르지 않다. 저축은행업계는 6.27 부동산 대출 규제 시행에 따라 기존 연 소득의 1~2배까지 내줄 수 있었던 신용대출 한도를 연 소득 이내로 전산에 반영 중인데, 이미 전산에 반영한 일부 저축은행에선 신용대출 승인율이 급락한 것으로 파악됐다. 규제 전후 대출 승인액이 평소 대비 70% 가까이 감소한 것이다. 별도 유예 기간 없이부동산 대출 규제가 시행돼 소식을 접한 저신용 차주들의 발걸음이 지난달 27일 급격히 몰린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업계에서는 '사실상 신용대출이 막혔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한 저축은행은 규제 후 신용대출 접수 건 중 승인되는 건수 비율이 50%포인트(p) 이상 줄었고, 다른 저축은행도 평소 대비 70~80%p 가까이 감소했다고 한다. 저축은행은 주로 중저신용자가 이용해 '급전 소액대출' 성격이 강한데, 이들의 대출 승인이 막혀 사실상 대출 한도가 남은 고신용자 위주로만 운영되는 셈이다.
'불황형 대출'로 불리는 카드론 또한 기타대출이 아닌 신용대출로 분류되며, 한도가 줄어들 전망이다. 카드론은 별도의 담보 없이 신용만으로 대출이 이뤄져 신용대출 성격을 갖지만 대출 분류상으론 '기타대출'에 해당하는데, 금융당국이 카드론을 신용대출로 분류해 규제 대상에 올린 것이다. 과거 부동산 과열기에 은행 대출을 넘어 카드론까지 끌어와 집을 사는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대출) 사례를 참고, 카드론 또한 신용대출에 포함해 집값 상승을 부추길 수 있는 요소를 근본적으로 차단하려 한 것으로 해석된다.
대출 절벽이 현실화하자 금융권에서는 이들이 불법사금융으로 내몰릴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저신용 차주에게 남은 방안은 대부업 등이 거론된다. 대부업의 경우 저축은행 대비 고금리라 차주의 이자 부담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또 다른 방안은 LTV, DSR 규제를 받지 않는 온라인투자연계금융업(온투업·P2P금융)이다. 2금융권이 DSR 50% 등의 강력한 규제를 받는 것과 달리, 온투업체는 '온투업법'상 동일 대출자에게 총대출 잔액의 7% 혹은 70억원 중 적은 금액 이내로 빌려 줄 수 있다. 상대적으로 느슨한 규제만 받는 것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온투업에서 대출 승인이 부결되면 대부업으로, 대부업에서도 부결되면 사채 시장으로 가는 것이 보편적"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