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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 러시아 영공 복귀 수순 현대차·기아도 러시아 재진입 가시권 韓 기업 철수한 러 시장 中이 점령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종전을 향해가는 가운데, 대한항공이 러시아 측과 러시아 영공을 지나는 비행 항로를 재사용하는 방안에 대한 물밑협의를 시작했다. 업계는 국내 항공사들이 러시아 영공을 다시 통행하게 되면 시간과 비용 절감에 따른 이득이 상당한 만큼 수천억원에 이르는 효과를 거둘 것으로 보고 있다. 아울러 국내 자동차업계 등도 종전에 대비해 손해를 보전하고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다. 다만 러시아 시장에 다시 진출하면 그간 시장을 장악해 온 중국산과 경쟁해야 한다. 전쟁을 개시한 이후 러시아 내수 시장은 상당수 중국 브랜드에 점령된 상태기 때문이다.
항로 재개 위한 물밑 작업, 외교부·국토부 지원
30일 정부와 항공업계에 따르면 대한항공은 최근 러시아 측과 영공 재개방과 관련한 실무 협상에 착수했다. 해당 사안에 정통한 소식통에 의하면 대한항공은 러시아 측에서 부과받은 과징금 문제를 해결하고, 향후 러시아를 통과하는 항공 노선도 미리 확보하는 ‘투트랙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
앞서 러시아 관세당국은 한·러 관계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악화된 2022년, 대한항공에 수천억원에 달하는 과징금을 부과했다. 이에 외교부와 국토교통부는 대한항공과 러시아 간 과징금 관련 실무 협상 등을 중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국토부는 러시아와 관계가 회복될 상황에 대비해 (러시아 영공 이용과 관련해) 실무적인 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한항공과 정부의 러시아 영공 재개방에 대비한 움직임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이 다가오면서 본격화하고 있다. 러시아는 최근 종전 협상의 카운터파트인 미국에 종전 혹은 정전을 조건으로 러시아와 미국 간 직항 노선 재개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는 미국이 러시아 영공 통행금지를 해제하면 유럽 등도 점차 제재를 완화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국내 항공사들은 러시아의 영공 통제 대상은 아니지만, 미국과 유럽 국가들의 ‘세컨더리 보이콧(제3자 제재)’을 우려해 러시아 기준 남쪽으로 우회한 항공 노선을 운영하고 있다. 해당 항로는 기존 러시아 영공 이용 노선보다 비행시간이 약 2시간 길다. 이 때문에 항공유만 연간 수백억원 이상 손실이 난다. 다만 대한항공은 “현재는 전쟁 중이라 운항 재개 등을 검토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다”라며 “추후 여건이 개선되면 적극 협력할 예정”이라고 원론적 입장을 밝혔다.

韓 대기업, 러시아 ‘공장 가동’ 시동
이런 가운데 시장의 관심은 현대자동차·기아, LG 등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전 러시아 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던 한국 브랜드들이 러시아 사업을 재개할 수 있을지에도 쏠리고 있다. 최근 러시아 현지 언론은 종전 후 한국 기업들이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자국 시장에 돌아올 것으로 예상했다. LG전자가 선두 주자로 꼽힌다. 러시아 가전업체 재키스를 설립한 구세인 이마노프는 지난 3월 말 자국 일간지 코메르산트와의 인터뷰에서 “LG전자가 러시아에 공식 복귀하는 첫 해외 대형 공급업체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실제로 LG전자는 최근 러시아 모스크바주 루자 도로호보에 있는 공장의 라인 일부를 조금씩 돌리기 시작했다. 전쟁 발발 이후 가동되지 않아 노후화 우려가 있는 생산설비를 다시 살리고 공장에 비축된 재고 자재를 소비하기 위한 조치다. 이들 공장은 전쟁 발발 직전까지 세탁기, 냉장고 등을 제조했다. 조주완 LG전자 최고경영자(CEO)는 이와 관련해 “아직 전쟁이 끝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조심해서 보고 있다”며 러시아 복귀를 확언하진 않았다.
하지만 공장 가동은 곧 있을 수 있는 생산 재개를 앞두고 예열 작업에 착수한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LG전자는 전쟁 전까지 러시아 국민 사이에서 세탁기, 냉장고의 주요 판매처로 자리매김했던 만큼 재진출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것이 유력한 분위기다. LG전자는 2022년 2월 현지 사업의 일부를 중단, 철수하기 전까지 러시아 세탁기, 냉장고 시장의 약 25~26%를 차지하고 있었다.
현대차의 러시아 복귀 기대감도 커지는 분위기다. 시장은 세계 완성차 기업 중 현대차가 가장 먼저 러시아 재진출 여부를 결정할 것으로 본다. 2023년 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을 1만 루블(17만원)에 매각한 현대차그룹은 올해 연말까지 재진출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현대차그룹은 러시아 벤처캐피털(VC) 아트파이낸스에 매각할 당시 2년 이내에 공장을 되살 수 있다는 조건(바이백)을 달았다. 바이백 권리 소멸 시효가 오는 12월인 만큼 최종 결정까지 시간 여유가 있다.
전쟁 발발 전 현대차도 러시아 수출 비중이 높았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2021년 한국의 대러시아 수출 품목 중 자동차(25억 달러·25.5%)와 자동차 부품(15억 달러·15.1%)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체 40%를 넘었다. 현대차·기아가 당시 러시아에서 판매한 차량은 35만7,000대에 달했다. 시장점유율은 21%였다.
중국산에 점령된 러시아, 재진출 전략 필요
다만 우리 기업들이 러시아로 다시 돌아갈 경우 중국과의 경쟁이 불가피하다. 중국 기업들은 현대차가 철수한 러시아 자동차 시장의 절반 이상을 장악하며 새로운 강자로 군림했다. 한국자동차모빌리티산업협회(KAMA)가 이달 1일 발표한 ‘러시아 자동차 산업 현황 및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의 대러시아 자동차 수출은 2022년 15만4,000대에서 지난해 117만 대로 7.6배가량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2021년 8%대에 그쳤던 러시아 차 시장에서 중국계 브랜드 점유율도 지난해 60.4%까지 늘었다. 러시아 자동차 시장 분석기관 오토스탯(아브토스타트)에 의하면 지난해 러시아에서 판매된 신차는 총 157만1,272대로, 가장 많이 팔린 브랜드 '톱10' 중 8개를 하발, 체리, 지리 등 중국 브랜드가 차지했다. 대러시아 경제 제재로 글로벌 주요 완성차 업체들이 시장에서 철수한 틈을 타 중국계 기업들이 러시아·중국 전략 공조 방침에 따라 완성차 및 부품 공급을 확대하면서 이런 결과가 나타났다.
가전업계도 마찬가지다. 전쟁 이후 대러시아 제재로 공급이 제한되면서 중국, 튀르키예 등 우호국의 수입이 대폭 증가한 반면 삼성전자, LG전자 등 한국 기업의 점유율은 대폭 떨어졌다. 2023년 기준 러시아 가전 시장에서 중국, 튀르키예, 벨라루스 기업의 점유율이 40% 이상을 기록한 것이 이를 방증한다. 이에 따라 가전업계도 종전 후 제재가 풀리더라도 한국 기업이 이전의 점유율을 회복하기 쉽지 않을 전망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전쟁 이후 국내 기업의 러시아 생산이 대폭 감소했고, 그 자리를 중국 기업 등이 대체했다"며 "실제로 전쟁이 끝나고 러시아 제재가 해제될 때까지 상황을 지켜봐야겠지만, 제재가 풀리면 국내 기업에는 실적을 회복할 기회는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