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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트럼프 '반DEI' 정책 수용 거부 재정 압박 가하며 숨통 옥죄는 트럼프 美 학계 경쟁력 약화 우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대학 길들이기’ 행보에 대한 저항이 거세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보조금, 면세 혜택 등을 무기로 주요 대학을 압박하는 가운데, 학계는 물론 버락 오바마 미국 전 대통령 등 유명 인사들까지 강력한 반발 의사를 표명하는 양상이다.
트럼프에게 반기 든 하버드대
14일(이하 현지시각) 하버드대는 앨런 가버 총장 명의의 공개서한을 내고 트럼프 대통령의 ‘반(反)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 정책’ 수용을 거부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지난 11일 트럼프 행정부는 하버드대에 학내 반유대주의 시위 단속, 입학과 교수진 채용 등 학제 운영에 대한 상세한 요구 사항을 담은 문건을 발송했다. 대학 측은 이 요구가 하버드대의 역사와 전통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버드대 유명 동문들은 공개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을 비판하며 대학 측을 지지하고 나섰다. 일례로 컬럼비아대 학사와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한 오바마 전 대통령은 15일 소셜미디어(SNS) 엑스(X·구 트위터)에 “하버드는 학문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불법적이고 강압적인 시도를 거부하는 동시에 하버드의 모든 학생이 지적 탐구, 엄격한 토론, 상호 존중의 환경에서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구체적인 조처를 하는 등 다른 고등 교육 기관에도 모범을 보였다”며 “다른 기관들도 이를 따르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대학가 내 협력 전선도 공고해지고 있다. 조나단 레빈 스탠포드대 총장과 제니 마르티네스 교무처장은 하버드를 지지하는 성명을 내고 “대학들은 정당한 비판에 겸손과 개방적 태도로 대처해야 한다"면서도 "그러나 건설적인 변화를 가져올 방법은 국가의 과학 연구 역량을 파괴하거나 정부가 민간 기관을 장악하는 방식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불복종'의 대가
곳곳에서 강력한 반발이 제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행정부는 좀처럼 뜻을 꺾지 않고 있다. 미국 정부는 하버드대가 정책 수용 거부 입장을 표명한 14일 즉각적으로 하버드대에 수년간 지급될 22억 달러(약3조1,000억원) 규모 보조금과 6,000만 달러(약 854억원) 규모 계약을 동결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15일 캐롤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은 “트럼프 대통령이 하버드대 캠퍼스에서 일어난 극악무도한 반유대주의에 대해 사과하기를 원한다”며 “그들은 연방법을 따라야 한다”고 촉구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같은 날 자신의 SNS 트루스소셜에 “하버드가 계속해서 정치적·이념적·테러리스트의 영향을 받는 ‘병적 사상’을 조장한다면 (대학의) 면세 자격을 박탈하고 정치적 단체로서 과세해야 할지도 모른다"며 "면세는 전적으로 공익을 위해 행동하는 데 달려있다는 점을 기억하라”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16일에는 미국 국세청(IRS)이 CNN 방송을 통해 "실제로 하버드대의 세금 면제 지위 박탈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하버드대와 같은 교육, 종교, 자선 목적의 비영리 기관은 다양한 부분에서 면세 혜택을 받지만, 정치 활동을 하는 등 규정을 위반하면 면세 지위를 잃을 수 있다. 면세 지위를 잃은 대학은 자연히 재정적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된다.

美 학계, 재정 위기에 '신음'
문제는 정부 압박하에 하버드대를 비롯한 주요 대학들의 재정이 위축되면 미국 학계의 경쟁력 자체가 약화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최근 트럼프 행정부의 연구 예산 삭감으로 인해 학계에 발생한 혼란을 살펴보면 이 같은 문제점이 명확히 두드러진다.
앞서 트럼프 정부는 미국 국립보건원(NIH, National Institutes of Health) 연구비의 간접비 비율을 전체 연구 예산의 15%로 제한하겠다고 밝혔다. 미 연방효율성부(DOGE)를 이끌고 있는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수백억 달러의 기부금을 받은 대학들이 연구비의 60%를 ‘간접비’로 빼돌렸다는 사실이 믿어지는가”라며 “이들 대학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행정설비비용(Facilities & Administrative costs)으로도 알려져 있는 간접비는 랩의 연구 설비 관리와 연구원의 인건비, 기타 연구 수행에 연관된 각종 필수 비용을 가리킨다. NIH는 지난해 전체 예산의 80%에 해당하는 350억 달러(약 50조4,000억원)를 미국 주요 대학과 연구소에 보조금으로 지급했고, 이 중 90억 달러(약 12조7,710억원)가 연구 시설 유지, 행정 지원 등 대학 운영을 위한 간접비로 활용됐다.
간접 예산이 축소되면 연구·교육 시설들의 재정은 휘청일 수밖에 없다. 익명을 요구한 한 학계 관계자는 "일반적인 간접비의 비중은 30~70% 수준"이라며 "하버드와 예일, 존스 홉킨스 대학의 경우 연구 자금의 60~70%가 간접비"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를 15%로 낮추라는 것은 랩의 운영을 거의 중지하라는 요구에 가깝다"며 "불확실성을 직면한 미국 대학들은 벌써부터 박사 과정 입학을 줄이거나 중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