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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선박 건조 수주 5건에 그쳐, 사실상 생산 중단" 조선 실적 훌륭한 동맹국으로부터 선박 구매할 수도 韓, 고부가가치 선박 기술력 앞세워 美 진출 가능성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국의 해양 지배력 회복에 관한 행정명령'에 서명하며 국가 안보 차원에서 자국의 조선업의 재건을 공식화했다. 이번 행정명령은 조선 강국으로 부상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으로, 해양·물류·조선 분야 전반에 걸쳐 중국을 견제하는 조치들이 대거 포함됐다. 다만 미국의 조선업이 본격적인 회복 궤도에 오르기까지는 조선 역량이 우수한 동맹국으로부터 선박을 구매할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에 고부가가치 선박 부문에서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한 우리 조선업계에서도 향후 미국 군함과 상선 수주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트럼프, '美 해양 지배력 회복' 행정명령 서명
10일(현지시각)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조선업 재건을 위해 동맹국으로부터 선박을 구매할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날 백악관에서 각료회의를 주재한 트럼프 대통령은 "머지않아 조선업은 미국에 매우 중요한 산업이 될 것"이라며 "조선업 재건이 필요한 자금을 의회에 요청해야겠지만, 미국과 가깝고 조선 실적이 훌륭한 다른 나라에서 최첨단 선박을 구매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미국은 중국에 뒤처진 조선·해운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해군 함정 건조에 2054년까지 최대 1조 달러(약 1,430조원)를 투입하고, 전략상선단을 70대에서 250대로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전날 국가 안보 차원에서 미국 조선업의 재건을 골자로 하는 '미국의 해양 지배력 회복에 관한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해당 명령에는 중국의 해양·물류·조선을 견제하는 조처들이 대거 포함됐다. 마이크 왈츠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지난해 중국 조선소는 1,700건의 선박 건조를 수주했지만, 같은 기간 미국은 5건을 수주하는 데 그쳤다"고 보고했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은 사실상 선박 건조를 중단한 상태"라며 "이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조선업을 재건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중국의 조선업 성장에 대응해 국가 안보 차원에서 미국 조선업을 부활시키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풀이된다. 동시에 조선업이 재건되는 동안에는 조선 강국 동맹국으로부터 군함이나 상선을 구매할 수밖에 없고, 이를 위해 의회에 구매 자금 승인을 얻어야 한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협력 전제로 中 견제에 동참하라 압박할 수도
현재 우리나라는 세계 1위의 조선업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어 트럼프 행정부의 기조는 국내 조선업계에 호재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8일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총리와의 첫 통화에서도 한미 간 협력 분야로 조선업을 언급한 바 있다.
실제 한국 조선업은 지난달 중국을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주량을 기록했다. 영국의 조선·해운시황 분석기관 클라크슨 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3월 전 세계 선박 발주량 150만CGT(환산 톤수) 가운데 한국은 82만CGT(55%)를 수주해 1위에 올랐다. 중국은 52만CGT(35%)로 2위를 기록했다. 선박 수 기준으로는 전체 58척 중 한국과 중국이 각각 17척, 31척을 수주했다. 선박 수에서는 중국이 앞섰지만, 한국은 고부가가치 대형 선박을 중심으로 수주하면서 총 발주량에서는 우위를 점했다. 게다가 한국은 미국이 구매를 검토 중인 고부가가치 선박 건조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고 있어 향후 한미 간 협력 가능성도 높아졌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중국 견제에 동참하라는 압박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이번 행정명령에는 "중국에 대한 잠재적 조치와 관련해 조약 동맹국·파트너국·유사 입장국 등과 협력해야 한다"는 문구가 포함돼 있다. 로이터통신은 이에 대해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 국적 선박에 대한 차별 정책을 동맹국에 강요할 수 있다"고 짚었다.
미국의 관세 압박도 변수다. 현재 미 무역대표부(USTR)는 미국에 입항하는 중국 선박에 최대 150만 달러(약 21억원)의 수수료 부과를 추진 중이다. 이 규제가 본격화할 경우 국내 조선업계는 반사이익을 기대할 수 있지만, 한국 역시 관세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한국의 관세가 미국보다 4배 높다"고 지적했고 지난 6일에는 한국에 25%의 상호 관세를 부과하기로 했다. 비록 현재는 유예 중이지만, 관세가 현실화되면 국내 조선업체의 수출 경쟁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팽배하다.

기술 이전·인프라 투자 압박 등 우려도 상존
기술 이전을 요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우리 정부는 미국이 국내 조선사에 현지 조선업 재건과 조선 인력 양성을 요청할 것으로 보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미 자국 조선업 정상화를 위한 정책 개발에 착수한 상태다. 지난 9일 트럼프 대통령은 행정명령을 통해 동맹국 조선소가 미국에 투자할 수 있도록 모든 인센티브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상세안은 미 상무부 주도로 90일 안에 마련될 예정이다. 또한 교통부에는 조선소 투자와 선박 수리 시설 개조 등에 필요한 금융 지원책을, 국무부 등에는 선원 인력 양성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미국이 동맹국 조선사가 현지에 조선소를 직접 운영하도록 유도할 경우, 기술 이전을 둘러싼 협상에서 국내 조선업체가 불리한 위치에 놓일 수 있다. 미 정부가 동맹국 기업에 적극적인 기술 공유와 노하우 이전을 적극적으로 요구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더욱이 트럼프 행정부가 해양 지배력 강화를 국가 전략으로 공언한 만큼, 단순한 투자 유치를 넘어 고부가가치 선박에 대한 기술력 이전까지도 압박할 수 있다. 미국이 필요한 최첨단 선박으로는 원유 운송선, 알래스카 에너지 개발에 필요한 쇄빙선, 이지스급 구축함 등이 거론된다.
장기적으로는 국내 조선사가 함정 건조 및 유지보수(MRO) 분야에서 미국의 군함 건조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미국 내 인프라에 대한 투자를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미국은 외국 조선소의 상선·함정 건조를 금지하는 존슨법과 연방법 8679 섹션은 지역 간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로 인해 개정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럼에도 최근 발의된 선박법상 전략적 상선 프로그램에 외국 건조를 한시적으로 허용한 점, 국익을 우선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 기조 등을 고려할 때 조선 역량이 우수한 한국의 조선 인프라 투자를 적극 유치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국내 조선업체 중에서는 한화그룹이 미국 내 인프라 구축에 가장 앞서 있다. 한화는 지난해 6월 미국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필리조선소 지분 100%를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했고, 같은 해 9월 미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CFIUS)의 승인을 얻어 12월에 인수 작업이 최종 완료됐다. 이로써 한화그룹은 한국 조선사 최초로 미국 현지 조선소에 이름을 올렸다. 이에 대해 존 펠란 미국 해군장관은 올해 2월 미 상원 청문회에 출석해 한화그룹의 필리조선소 인수를 언급하며 동맹국과의 조선업 협력과 자본·기술력 유치가 매우 중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