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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국영기업 팔아 5조원 마련 예정 장기화한 전쟁으로 양국 경제적 피해 막심 "손해만 본 건 아니다" 헐값에 팔려나간 글로벌 기업 러시아 기지

러시아가 국유자산의 민영화 계획을 발표했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정부 차원의 지출이 급증하며 재정 상황이 위태로워지자, 자국 경제를 떠받치기 위한 대응책을 마련한 것이다. 러시아와 전쟁을 치르며 수천억 달러 규모의 피해를 떠안은 우크라이나 역시 국유자산 매각을 통해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자금 확보 나선 러시아
23일(이하 현지시각) 미국의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는 러시아 정부가 7개 대기업의 지분을 매각해 3,000억 루블(약 5조2,020억원)을 조달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장기화하며 경제에 막대한 충격이 발생하자, 국영 기업의 민영화를 통한 자금 확보에 나선 것이다. 미국 펜타곤 추정치에 따르면 러시아의 전쟁 비용은 2024년 12월 기준 2,110억 달러(약 309조6,600억원)를 넘어섰다. 2024년 러시아 국방 부문에 투입한 예산은 국가 전체 예산 중 23%에 달한다.
정부 차원의 군사 지출이 급증한 러시아에서는 자연히 ‘군사적 케인스주의’ 효과가 발생했다. 군사적 케인스주의는 군사 지출을 늘려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정책을 일컫는 용어로, 영국의 저명한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가 주창한 ‘공공 지출을 통한 경기 부양 정책’을 차용한 개념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경제 자원을 무기 생산에 집중한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 프랭클린 루스벨트 집권 당시 전쟁 특수로 대공황에서 탈출한 미국 등이 군사적 케인스주의 효과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독일과 미국의 전례처럼 러시아는 전쟁 발발 이후 주요 7개국(G7) 등 서방의 강력한 제재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선전했다. 에너지 수출 등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자금을 민간 기업과 방산 업체에 투입, 각종 무기와 장비 등 군수품을 생산하며 전시경제 체제를 운영한 결과다. 러시아의 경제 성장률은 2023년 3.6%, 2024년 4.1% 수준이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의 충격
문제는 러시아 경제의 기초체력이 약화하며 군사적 케인스주의가 한계에 부딪혔다는 점이다. 지난해 러시아가 떠안은 재정 적자는 3조 루블(약 51조9,100억원)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1.7%에 달했다. 이는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0년 이후 가장 큰 재정 격차다. 2022년 전쟁 첫해에 17.8%까지 치솟았던 소비자물가 상승률 역시 2024년 12월 9.5%로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러시아의 교전국인 우크라이나 역시 경제적 위기에 직면한 것은 마찬가지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의 주택, 교통, 에너지, 농업 분야에서 발생한 직접적인 전쟁 피해액은 1,520억 달러(약 182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우크라이나의 재건과 회복에 투입돼야 할 비용은 UN(국제연합) 추산 기준 4,860억 달러(약 713조1,560억원)에 달한다.
우크라이나도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국영자산을 매각하는 방식을 택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시차를 두고 동일한 전략을 채택한 셈이다. 지난해 7월 우크라이나 국부펀드 국유재산기금(SPF)이 발표한 국유자산 민영화 대상 기업 1차 명단에는 60년 역사를 자랑하는 호텔 우크라이나와 오션 플라자 쇼핑몰, 우크라이나 최대 티타늄 광석 생산업체 UMCC(United Mining and Chemical Company), 데무린스키 광산·가공 공장, 폭기 콘크리트 생산업체 에어록(Aeroc) 등이 이름을 올렸다.
러시아에 돌아간 이득
장기화한 전쟁으로 인해 양국이 극심한 피해를 입었지만, 일각에서는 러시아가 손해만을 떠안은 것은 아니라는 평도 나온다. 다수의 글로벌 기업이 헐값에 러시아 생산 기지를 팔아치우고 시장에서 철수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덴마크 맥주회사 칼스버그의 경우, 지난 2022년 현지 기업에 러시아 자산을 3억 유로(약 4,430억원)에 매각했다. 이는 칼스버그 장부상 자산의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헐값이다.
지난 2023년 말 현대자동차도 1만 루블(14만원)을 받고 현지 기업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을 매각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현지 자동차 부품 수급이 불안정해지자, 헐값에 공장을 처분한 것이다. 다만 현대자동차는 매각 당시 2년 내 공장을 되살 수 있는 ‘바이백’ 조건을 내걸었으며, 휴전 협상이 본격화한 현재 현지 채용을 확대하며 러시아 시장에 복귀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고 있다.
업계는 현대자동차의 러시아 시장 복귀가 시간 문제라고 예측한다. 휴전으로 인해 일시적 호황을 맞이했던 방산 시장의 일자리가 사라질 경우, 러시아 정부가 '빈틈'을 메우기 위해 적극적으로 전후 외국인 투자 유치에 나설 것이라는 분석이다. 실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13일 “러시아는 복귀 기업을 환영할 준비가 돼 있다”고 공개적으로 러브콜을 보낸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