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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환율 결정권, 시장보다 정부에
2015년 기습 평가절하 상흔 장기화
제도 개선 불구 위안화 국제 위상 여전

중국의 환율 체제가 시장 기반의 ‘관리변동’ 체제로 안착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위안화 환율 결정 방식이 일부 시장화되며 변동 폭이 확대됐다는 진단이다. 다만 환율 결정권이 인민은행에 집중된 구조는 여전한 데다, 과거 위안화 기습 평가절하로 무너진 국제 금융시장의 신뢰 또한 회복이 요원한 실정이다. 이와 같은 환율 결정 투명성 부족과 중국 정부의 금융규제 리스크가 발목을 잡으면서 위안화의 국제화 역시 제자리걸음에 머무는 모습이다.
‘반쪽짜리 자유화’ 관리변동환율제
12일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스탠다드차타드은행의 딩솽(Ding Shuang) 수석 중국 이코노미스트를 인용해 “과거 극심한 위안화 가치 하락 압력에 직면한 중국 중앙은행은 외환보유고에 의존해 통화 지원에 거의 1조 달러(약 1,400조원)를 소진한 바 있다”면서 “이후 중국의 환율 관리 툴킷은 훨씬 더 다양해졌고, 직접 보유고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됐다”고 진단했다. 중국의 환율 체제가 시장 기반 관리변동 체제로 안착했으며, 과거와 같은 급격한 위안화 가치 하락은 재발할 가능성이 낮다는 분석이다.
다만 시장의 평가는 다르다. 중국이 명목상 관리변동환율제를 채택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인민은행이 강하게 개입하는 고정환율 성격을 유지하고 있는 탓이다. 완전 고정환율제에서 관리변동환율제로 전환한 것은 2010년으로, 당시 중국 정부는 환율 시장 개방과 국제화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환율은 여전히 인민은행이 기준환율을 결정하고, 허용 범위 내에서만 변동하도록 설계됐다. 외형적으로는 시장 변동성을 일부 반영하는 형태를 취하되, 실상은 정부가 환율 흐름을 통제하는 구조다.
중국 정부가 관리변동환율제를 택하고 나선 근저에는 외환시장 안정과 수출 경쟁력 유지를 중시하는 정책 기조가 깔려 있다. 일반적인 변동환율제는 환율이 시장 수급에 따라 자유롭게 변동하는 반면, 중국의 관리변동환율제는 변동 폭이 인민은행 결정에 종속돼 있다. 이는 수출 기업에는 예측 가능한 환율 환경을 제공하지만, 해외 투자자에게는 예측 불가 리스크로 작용한다.
이처럼 환율 결정이 시장 상황보다 정치적 판단에 좌우될 수 있다는 점은 오랜 시간 위안화의 국제화에 큰 걸림돌로 작용해 왔다. 환율이 시장 논리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 상황에서는 국제 무역과 투자에서 위안화를 결제통화로 채택하려는 움직임도 제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국의 환율 제도가 국제 금융시장에서 ‘반쪽짜리 자유화’로 인식된 배경이다.
정책 재량 한계 드러낸 평가절하
위안화의 국제적 신뢰도를 떨어뜨린 또 하나의 결정적 사건으로는 10년 전 인민은행의 기습적인 위안화 평가절하를 꼽을 수 있다. 2015년 8월 11일 인민은행은 갑작스럽게 위안화 기준환율을 1.9% 절하했다. 다음 날과 그다음 날에도 추가 절하가 이어지며 위안화는 불과 사흘 동안 4.4% 평가절하됐다. 이는 20년 만에 가장 큰 폭의 환율 조정이었다. 이에 글로벌 외환시장은 급격히 흔들렸고, 아시아 증시와 원자재 가격도 동반 하락하며 충격이 확산됐다.
기습적인 위안화 평가절하의 이면에는 중국의 수출 중심 성장 모델이 있었다. 당시 중국 제조업은 글로벌 수요 둔화로 어려움을 겪었고, 위안화 강세가 수출 부진을 심화시킨다는 인식 또한 짙은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중국 정부가 환율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단기 효과는 분명했다. 평가절하 직후 수출 가격 경쟁력이 개선되면서 제조업 수출 회복 가능성은 커졌고, 일부 산업에서는 주문량 증가도 속속 확인됐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긍정적 효과는 오래가지 못했다. 금융시장에서는 위안화에 대한 신뢰가 급격히 무너졌고, 해외 투자자들은 자산가치 하락과 환차손 우려로 위안화 보유를 기피했다. 인민은행은 기준환율 산정 방식을 일부 조정했을 뿐 시장 환율을 반영한 조치라고 설명했지만, 시장 참여자들을 설득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인민은행의 기습적인 위안화 평가 절하는 관리변동환율제라는 제도 자체가 지닌 정책 재량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례로 분류됐다.
후폭풍은 장기적이었다. 선진국뿐 아니라 많은 신흥국이 외환보유액 중 위안화 비중을 줄였고, 관리변동환율제의 취약점을 확인한 베트남, 카자흐스탄 등 일부 국가는 환율 제도를 보다 유연한 방향으로 전환하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특히 “중국 정부는 필요할 때 언제든 통화 가치를 조정할 수 있다”는 인식이 시장에 깊이 각인되면서 국제 금융시장에서의 신뢰는 돌이키기 어려울 만큼 훼손됐다.

중국 “달러 대체” 자신감에도 시장은 ‘갸웃’
이 같은 이유로 중국의 위안화 국제화 전략 또한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는 실정이다. 중국은 2009년 위안화 국제화 추진계획을 공식 선언한 이후 러시아, 인도 등 브릭스(BRICS) 국가들과 무역 결제에 위안화를 활용하면서 국제 결제 비중을 확대해 왔다. 이와 함께 환율 시장 개방과 해외 채권 발행 확대,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망 참여 등 제도 개선을 병행했다. 그 결과 2020년대 들어서는 위안화 표시 채권(판다본드)을 발행하는 국가가 눈에 띄게 늘고, 역외 위안화 시장도 성장하며 물리적 유통 기반이 갖춰졌다.
그러나 국제화의 핵심 조건인 ‘시장 신뢰’는 여전히 부족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러시아, 이란 등 서방과 갈등을 빚는 국가들이 위안화를 결제 수단으로 채택하는 사례가 늘었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이러한 흐름은 주로 지정학적·정책적 필요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자발적인 위안화 선택과는 차이가 있다는 지적이다. 단순히 결제 규모가 커진다고 해서 곧바로 국제 금융시장에서의 신뢰도가 상승하는 것은 아니란 게 전문가들의 일관된 견해다.
그럼에도 중국은 여전히 위안화 국제화에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무역 파트너 다변화와 외환보유 다변화를 원하는 국가들에 위안화는 달러 의존도를 줄일 수 있는 최적의 대안이 될 것이란 자신감에서다. 이를 통해 중국은 역외 금융시장 확대, 자본 유입 경로 다양화, 위안화 표시 자산의 글로벌 비중 확대를 기대한다는 입장이다. 나아가 국제통화기금(IMF) 특별인출권(SDR) 내 위안화 비중 상향, 국제 무역 결제 점유율 확대 등 성과도 노리는 모양새다.
하지만 이 또한 구조적 한계가 분명하다. 환율 결정 과정의 투명성 부족, 자본시장 개방 미흡, 금융규제 리스크 등이 위안화 신뢰를 제약하는 요인으로 남아 있는 탓이다. 이러한 제약이 해소되지 않는 한, 국제 시장에서 위안화는 결제·유통량이 늘더라도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 면에서 달러·유로와 대등한 위치에 서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중국 정부의 기대와 달리 위안화 국제화가 오랜 시간 단꿈에 그칠 것이란 관측이 주를 이루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