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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대기업의 캐나다·멕시코 법인 총 201곳 미·중 무역 갈등 속에 대미 수출기지로 활용 美 현지 생산·생산지 다변화 등 대응 본격화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관세 전쟁이 본격화하면서 국내 기업들이 생산기지 다변화 등 대응 전략을 모색하고 있다. 특히 주요 수출기업의 생산 거점이 포진한 캐나다와 멕시코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위협이 지속되면서 미국 이전이 가속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편 국내 산업계에서는 미국 정부의 극단적인 온쇼어링 기조가 대기업-중견기업-중소기업으로 이어지는 한국 제조업 생태계를 와해시킬 것이란 우려가 제기된다.
韓 기업들, 캐나다·멕시코로 생산기지 옮겨 수혜
5일 산업계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멕시코와 캐나다산 수입품에 25% 관세를 부과하기로 예고함에 따라 멕시코와 캐나다에 주요 생산라인을 둔 국내 대기업들은 미국 현지 생산 또는 생산지 다변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시행 전날인 지난 3일 멕시코와 캐나다산에 대한 25% 관세 부과를 한 달 유예하기로 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강조해 온 ‘관세 장벽 쌓기’가 현실화하는 모양새다.
멕시코와 캐나다는 한국 기업의 최대 수출 시장인 미국과 지리적으로 인접해 물류비가 적게 드는 데다 ‘미국‧멕시코‧캐나다 협정(USMCA)’ 덕에 미국 수출 시 무관세 혜택을 볼 수 있다. 멕시코의 경우, 값싼 노동력을 이용해 원가를 절감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이에 한국의 반도체·가전·배터리 기업들은 미·중 무역 갈등이 심화했던 트럼프 1기 행정부 때부터 멕시코와 캐나다로 생산기지를 옮겨 니어쇼어링의 혜택을 누려 왔다.
삼성·LG·현대차 등 일부 물량 美 이전 등 검토 중
하지만 미국의 관세 부과 방침으로 멕시코와 캐나다 지역에 둥지를 튼 한국 기업들은 역풍을 맞을 수밖에 없게 됐다. 4일 기업분석전문 한국CXO연구소가 공정거래위원회 지정 88개 대기업집단을 대상으로 캐나다와 멕시코 현지에서 운영하는 해외법인 현황을 조사한 결과, 25개 대기업집단의 캐나다·멕시코 법인은 총 201곳으로 나타났다. 나라별로는 캐나다가 110곳, 멕시코가 91곳으로 집계됐다.
그룹별로는 삼성이 68곳으로 가장 많았다. 삼성은 캐나다에 50곳, 멕시코에 18곳의 회사를 둔 것으로 파악됐다. 삼성은 캐나다에만 40곳이 넘는 법인을 세워 태양광·풍력·신재생에너지 사업을 전개하고 있으며 멕시코 법인은 가전제품을 생산한다. 현대차그룹은 멕시코에 16곳, 캐나다에 12곳, 총 28곳의 법인을 뒀다. 특히 멕시코에서는 계열사인 현대차·기아·현대모비스가 각각 별도 법인을 설립해 운영 중이다.
한화는 14개의 법인을 멕시코(12곳)와 캐나다(2곳)에서 운영 중인데, 상당수는 태양광 관련 사업을 위한 회사인 것으로 조사됐다. LG는 멕시코에 LG전자 전자제품 생산 법인 등 8곳, 캐나다에 LG에너지솔루션이 스텔란티스와 합작한 넥스트스타에너지 배터리 공장 등 3곳을 운영 중이다. 포스코 역시 멕시코에 철강 사업 법인 등 6곳, 캐나다에 포스코퓨처엠이 제너럴모터스(GM)와 합작한 양극재 공장 등 5곳을 운영한다.
캐나다와 멕시코를 대미 수출기지로 활용해 온 해당 기업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 이후 본격적인 대응 방안 마련에 들어갔다. 삼성전자는 멕시코 공장에서 생산하던 건조기 물량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뉴베리 공장으로 옮기는 방안을 고려 중이며 LG전자는 멕시코에서 생산하는 냉장고 물량을 미국 테네시주 공장으로 옮기는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다. 기아는 멕시코 누에보레온 공장에서 생산하는 K4의 일부 물량을 캐나다로 전환해 북미 시장에서의 포지셔닝을 재조정하고 있다.
신규 투자비, 고임금 부담에 당장 이전은 힘들 듯
미국으로의 생산 거점 이전이 거스를 수 없는 상황이 되면서 국내에서는 한국 제조업 생태계의 붕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주요 기업의 미국 현지 투자가 늘면서 수출 대기업과 중소·중견기업 간 분업 구조가 약화할 것이란 지적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 현지에 직접 투자하는 온쇼어링을 압박하고 있는 만큼 결국 미국에 생산 거점을 마련하는 것은 물론 소재·부품까지 현지에서 조달하게 될 경우, 한국의 중견·중소 제조기업은 러스트 벨트가 될 가능성이 크다.
다만 일각에서는 국내 기업이 트럼프의 관세 부과에 대응해 멕시코와 캐나다의 생산시설을 곧바로 미국 혹은 제3의 지역으로 옮기기는 어려울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비용과 효율성 면에서 제약이 크기 때문이다. 캐나다나 멕시코에 있던 생산시설을 미국으로 이전할 경우 막대한 신규 투자비가 드는 데다, 미국의 높은 임금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트레이딩이코노믹스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 제조업 임금 평균은 시간당 28.34달러로 멕시코(3.7달러)의 8배에 이른다.
트럼프 행정부의 고관세 정책이 얼마나 지속될지도 불확실하다. 관세 인상의 배경에 캐나다와 멕시코 정부를 대상으로 무역수지 불균형, 불법 이민, 마약 억제 등의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전략적 의도가 깔린 만큼 국가별 협상 결과에 관세 압력이 조기에 완화될 가능성도 있다. 더욱이 미국 내에서도 고율 관세가 상품 가격에 전가돼 미국 소비자들의 부담만 가중할 것이란 비판이 나오고 있어 트럼프 행정부에 부담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