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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남아공 토지수용법 “반미, 반백인 정책” 비난 남아공 원조 중단 결정, 글로벌사우스 국가들과 관계 악화 일대일로 등 통해 남아공 끌어당기려는 중국과 대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대한 원조 중단을 명령하면서 아프리카 대륙에서 미국과 중국 간 영향력 경쟁의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번 조치가 남아공이 더욱 중국으로 기울고, 글로벌사우스(남반구의 개발도상국가) 국가들도 더욱 미국에서 멀어지게 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트럼프, 남아공 지원 중단 및 주미 남아공 대사 추방
16일(이하 현지시각)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트럼프 대통령의 남아공에 대한 지원 중단 조치는 아프리카에서 중국이 일대일로 정책을 펴며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하는 것과는 반대의 움직임인 만큼, 남아공을 더욱 중국으로 기울게 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앞서 지난달 7일 트럼프 대통령은 행정명령을 통해 남아공에 대한 원조와 지원 중단을 지시했다. 그는 남아공 지도부가 반미, 반백인 입장을 취하고 이란이나 하마스 같은 '세계 무대의 나쁜 행위자들'을 지원한다고 비난했다.
지난 14일에는 에브라힘 라술 주미 남아공 대사를 외교적 기피인물(페르소나 논 그라타)로 지정하기도 했다. 미국 정부가 주미 대사를 기피 인물로 지정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이날 X(옛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라술 대사가 “미국을 증오하고 인종 혐오를 미끼 삼는 정치인”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라술 대사가 남아공의 한 싱크탱크가 주최한 세미나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전 세계에서 미국 지상주의 운동을 동원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보도한 극우 언론 브레이트바트 기사를 공유했다. CNN은 미 국무부 대변인실 관계자를 인용해 라술 대사가 21일까지 미국을 떠나야 한다고 전했다.
이에 남아공은 트럼프의 명령을 "잘못된 정보와 선전 캠페인"으로 규정하고 "부당하고 부도덕한" 인종 차별 혐의를 부인했다. 남아공 정부에 따르면 시릴 라마포사 남아공 대통령은 지난 1월 말 공공 목적 또는 공익을 위해 토지를 수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영향을 받는 사람들에게 정당하고 공정한 보상을 약속하는 토지수용법에 서명했다.
이 법은 1994년에야 종언을 고한 극도의 인종차별 아파르타이드 정책 아래서 수십 년 동안 백인 소수계 지배의 악폐를 시정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남아공은 6,200만 명의 인구 중 약 7%를 차지하는 백인이 개인 농장의 약 70%를 소유하고 있으며 흑인보다 평균 3배 더 많은 소득을 올린다는 조사도 있다. 시릴 라마포사 남아공 대통령은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했으며, 남아공 정부는 "비생산적인 확성기 외교"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주미 대사 추방에 대해서는 “유감스러운 결정”이라는 성명을 냈다.

개도국들 중국으로 기울게 하는 효과
전문가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잘못된 판단에 기반한 자기중심적인 외교 정책이 미국의 세계적 입지와 소프트파워를 어떻게 해치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입을 모은다. 펜실베이니아주 버크넬대 국제관계학 교수인 주즈쿤(Zhu Zhiqun)은 “미국의 주요 관심사가 중국과의 경쟁이라면 트럼프 행정부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역효과가 있다”며 “미국의 동맹국과 우방국을 포함한 다수 국가를 중국에 더 가까이 끌어들일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 미국의 지원 동결 행보는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지난달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린 G20(주요 20개국) 회의에 참석해 남아공 지원을 밝힌 것과 대비된다. 남아공은 비(非)서방 신흥경제국 연합체인 브릭스(BRICS) 회원국이자 중국의 일대일로 인프라 투자 계획의 주요 파트너다.
중국은 2008년 미국을 제치고 남아공의 최대 교역 상대국이 됐으며, 남아공은 13년 연속 아프리카에서 중국의 최대 교역 상대국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2023년 양국 무역 규모는 556억 달러(약 80조4,000억원)에 달했으며, 중국 기업들은 광업과 자동차에서 금융과 미디어에 이르기까지 남아공 기업에 101억 달러를 투자했다. 또한 2023년 시진핑 국가주석의 요하네스버그 방문 중 서명한 공동성명에서 양측은 인프라, 무역, 제조업, 에너지 자원, 디지털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기로 약속하기도 했다.
중국은 또 지난달 개최된 UN 안전보장이사회 연설에서 남아공을 포함한 글로벌 사우스 국가와 함께 더 많은 객관·공정·이성의 목소리를 내고 전쟁 중지를 위해 공동 인식을 모아 평화를 위한 다리를 놓을 것이라고 했다. 당시 왕 부장은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되며 정글의 법칙으로 돌아가서도 안 된다"면서 "국제 정세가 어떻게 변하든 중국은 다자주의에 전념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을 직접 거론한 것은 아니지만 트럼프 행정부의 일방주의 외교를 겨냥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對 캐나다 관세·합병 위협에 G7 연대 움직임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가 촉발한 역효과는 이뿐만이 아니다. 최근 캘거리에서 열린 G7 국가들의 외무장관 회의에서는 럼프 대통령의 캐나다 합병 발언과 무역 관세 위협에 맞서 나머지 국가들과 캐나다와의 연대가 주요 관심사로 떠올랐다.
앞서 독일의 아날레나 배어복 외무장관과 EU(유럽연합)의 카야 칼라스 외무장관은 멜라니 졸리 캐나다 외무장관을 지지하는 메시지를 소셜미디어(SNS)에 게시했다. 배어복 장관은 또 기자들에게 "캐나다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애국적인 캐나다 텔레비전 광고를 봤다"며 "독일인으로서, 유럽인으로서 우리는 이 공통된 정신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안토니오 타자니 이탈리아 외무장관도 트럼프의 발언을 일축하며 "대답은 매우 명확하다. 캐나다는 미래의 캐나다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미국 측에서는 마르코 루비오 국무장관이 긴장 완화에 나섰다. 그는 북미 영공을 방어하기 위한 미국과 캐나다의 합동 군사 협력과 우크라이나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노력을 언급하면서 "우리는 함께 일하고 있는 다른 많은 일들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가 캐나다를 어떻게 인수할 것인지에 대한 회의가 아니다. 나는 그것이 상황을 개선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악화시킬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루비오 장관은 또 관세 정책을 옹호하며 "단지 캐나다, 멕시코, G7 국가들에 대한 것이 아니다"라며 "현재 사실상 전 세계에 철강과 알루미늄 관세를 부과하고 있으며, 그 이유는 그 나라들을 처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내 역량 개발의 필요성 때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