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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에 대응할 적절한 도구 필요”
제재 해제 요구 러시아엔 ‘선 긋기’
우크라 평화유지군 파견 의지 강고

유럽연합(EU)이 범유럽 차원에서 위기에 대비한 새 전략을 발표했다. 특히 러시아의 무력 공격을 염두에 두고 회원국 각 가정에 최소 3일치 생필품을 비축하라고 권고했다. 불안을 조장하려는 의도보다는 직면한 위기의 규모와 과제를 명확히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게 EU의 설명이다.
평시 대비 체계 강화에 방점
26일(이하 현지시각)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외신에 따르면 EU 집행위원회는 전날 벨기에 브뤼셀에서 첫 안보 집행위원단 회의를 열고 ‘위기 대비 연합 전략(Preparedness Union Strategy)’을 채택했다. EU 차원에서 처음 수립된 이번 전략은 팬데믹(감염병 대유행), 사이버·하이브리드 공격, 재난재해 등 광범위한 위기에 대한 범유럽 차원의 대비 계획이다.
위기 대응 능력이 부족한 일부 국가들을 위해 핀란드, 스웨덴, 벨기에 등에서 오랫동안 시행해 온 정책을 참고해 만든 이번 계획은 구체적인 조치와 비입법적 제안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필수 물자의 비축 권고’와 ‘긴급 대피소 확충 및 안내에 대한 지침’ 등이 주요 내용이며, 국경을 초월한 대응 조율하기 위한 ‘EU 위기 대응 허브’ 신설, 위험 예측을 위한 ‘조기 경보 시스템 구축’ 등도 추진된다.
EU는 이번 계획에 따라 전쟁이나 재난 발생 시 의료, 상수도, 통신 등 서비스의 지속성을 보장하기 위해 더 많은 핵심 물자 비축을 진행할 방침이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현재 유럽은 새로운 수준의 대비 태세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진단하며 “우리 시민들, 회원국들, 그리고 기업들은 위기를 예방하고 재난이 닥쳤을 때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한 적절한 도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번 계획은 유럽 정보기관들이 “러시아가 향후 3~5년 이내에 EU 회원국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하는 가운데 나왔다. 앞서 사울리 니니스퇴 핀란드 전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발표한 보고서에서 “유럽이 냉전 종식 이후 안전을 당연시한 결과 현재 매우 취약한 상태에 놓였다”며 평시 대비 체계 강화를 서둘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에 이상 기후에 따른 자연재해, 금융 위기와 같은 사회적 위험이 고조되는 상황 또한 반영됐다. 카야 칼라스 EU 외교·안보 고위 대표는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외부 안보 문제와 하이브리드 공격에 직면해 있다”며 “유럽이 더 강해져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고, 위기의 결과를 처리하는 것보다 위기를 예방하는 것이 늘 낫다”고 말했다.

러시아 제재 완화 EU 손에
이날 EU는 러시아가 미국과의 협상에서 우크라이나와의 흑해 휴전 조건으로 제시한 제재 완화 조처는 없을 것이란 점도 분명히 했다. 앞서 러시아는 지난 23∼25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린 미국과 러시아, 우크라이나의 고위급 실무 회담에 참석한 바 있다. 회담 직후 러시아는 자국 금융 기관을 비롯해 식품, 비료 등에 부과되는 제재 해제가 선결돼야 한다는 조건의 흑해 해상 휴전안에 미국이 동의했다는 주장을 내놨다.
러시아는 당시 회담에서 자국 은행을 국제은행간통신협회(스위프트·SWIFT)에 다시 연결할 것을 미국에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벨기에 본사를 둔 스위프트는 EU의 관할권에 있다. EU는 러시아 은행과 금융서비스, 러시아 국적 선박과 항공기, 농기계, 에너지 등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제재를 가하며 러시아의 세계 시장 진입을 제한할 수 있었다.
러시아의 입장 발표 직후 아니타 히퍼 EU 외교안보담당 수석 대변인은 입장문을 내고 “우크라이나 전 영토에서 모든 러시아 군대가 조건 없이 철수하는 것이 제재 개정 또는 해제의 주요 전제 조건이 될 것”이라며 “러시아는 불법적이고 도발적인 침략 전쟁을 끝내기 위한 진정한 정치적 의지를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러시아가 전쟁을 끝낼 때만 제재를 완화할 것이란 의미다.
미국은 러시아의 요구가 갖는 맹점을 인정하면서도 동의 여부에 대해서는 확답하지 않았다.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기자들과의 만남에서 “러시아의 요구 조건은 간단하지 않은 문제”라며 “우리는 (러시아의 요구를) 다각도로 검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다만 러시아의 요구 조건 일부는 미국과 무관하며, 이는 유럽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부분”이라고 잘라 말했다.
자체 방어 및 군 구축 추진
유럽은 우크라이나의 휴전을 위한 군사 작전도 단계적으로 추진 중이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평화 협정과 우크라이나의 미래 안보 보장을 위한 강력하고 강건한 계획을 수립할 것”이라며 “유럽 내 주요 국가들이 자체 방어와 군을 구축하고, 평화유지군을 파견해 우크라이나 보호를 도울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 같은 스타머 총리의 발언은 지난 15일 유럽 등 서방 정상들의 화상 회의 직후 기자회견에서 나왔다. 당시 회의에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마르크 뤼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사무총장을 비롯해 유럽 국가들과 EU 집행위원회, 캐나다, 뉴질랜드, 튀르키예 등 30여 곳 세계 정상들이 참석했다.
스타머 총리는 프랑스와 주도해 우크라이나 종전 후 평화유지군을 보내기 위한 ‘의지의 연합’을 주창했다. 그는 “우리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행동할 때까지 앉아서 기다리지 않을 예정”이라며 “계속 전진할 것”이라고 의지를 다졌다. 아울러 이번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일본을 언급하며 많은 국가가 지원에 나설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 같은 청사진의 실현 가능성은 다소 불투명하다. 푸틴 대통령은 유럽의 평화유지군 배치에 반대한다는 뜻을 여러 차례 표명했다. 또 종전 이후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에 부정적인 미국의 뒷받침이 얼마나 보장될지도 정해진 바 없다. 이날 기자회견에서도 미국의 실제 지원 여부와 관련해 질문이 나왔지만, 스타머 총리는 “미국과 매일 논의를 하고 있다”며 구체적인 답변을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