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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T "美 핵 방어막에 대한 동맹국 신뢰 흔들려" NATO 등 동맹국들, 자체 핵 개발 가능성 검토 韓·日, 美 핵 억제력 약화에 中과 공조 탐색

최근 미국의 핵 방어막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면서 미국의 동맹국들이 자체 핵무기 개발 가능성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 독일, 폴란드, 프랑스 등 유럽 동맹국들은 핵 자주권에 대한 논의를 확대하고 있으며 한국과 일본은 미국의 핵우산 약화에 대응해 중국과의 결속을 모색하고 있다. 냉전 시대부터 이어져 온 미국 주도의 '핵 억제' 질서가 근본적인 변화를 맞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트럼프 집권 후 친러 기조, NPT 체제 흔들려
24일(이하 현지시각)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 이후 미국의 대(對)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정책이 부정적인 입장으로 전환하면서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가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고 보도했다. FT는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후 NATO를 경시하며 무용론까지 언급하는 데 반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관계 회복에 집중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변화로 유럽 동맹국들은 예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미국의 핵 방패 철수에 대비하는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FT는 "과거 고(故) 데니스 힐리 영국 장관은 미국의 핵 정책이 러시아를 억지하는 데는 5%의 신뢰도만 필요하지만, 유럽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는 95%의 신뢰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며 "트럼프 대통령 집권 체제에서는 그 확신이 그 어느 때보다 약하다"고 전했다. 미 싱크탱크 카네기국제평화재단의 안킷 판다 연구원도 "소위 '트럼프 현상'이 핵 비확산에 대한 강대국의 합의가 약화시켰다"며 "대미 신뢰도 저하에 따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결국 제 손안에 핵무기가 있어야 한다는 동맹국 내 목소리가 강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따른 공식 핵보유국은 UN(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인 미국, 러시아, 중국, 프랑스, 영국 등 5개국으로 제한된다. 그러나 NPT에 서명하지 않은 인도, 이스라엘, 파키스탄이 이미 핵무기를 개발했으며 NPT를 탈퇴한 유일한 국가인 북한도 핵보유국으로 자리 잡았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핵 억제 보장을 철회하면서 NPT 체제가 흔들리고 있다"며 "핵무장국이 과거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이 예상했던 15∼25개국 수준에 가까워지면서 핵전쟁 위험이 커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에 유럽 동맹국들은 핵 자주권 논의를 본격화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유력한 총리 후보인 프리드리히 메르츠 기독민주당 대표가 "핵 공유를 비롯해 최소한 영국과 프랑스의 핵 안보 체제가 독일에도 적용될 수 있는지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하면서 자국 내에서 전례 없는 공개 토론을 촉발했다. 폴란드에서는 도널드 투스크 총리가 자체 핵무기 개발이나 프랑스와의 핵 공유 협정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고 제안했고, 이에 안제이 두다 대통령은 미국의 핵탄두를 폴란드로 이전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프랑스에서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지난 18일 프랑스 북동부 뤽세유 생소베르 공군기지를 방문해 이곳을 프랑스 핵 억지 전략의 중심 기지로 전환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미라주 2000-5 전투기 26대를 보유한 이 공군기지는 NATO의 공중 방어에서 핵심 역할을 하고 있다. 마크롱 대통령은 15억 유로(약 2조4,000억원)를 투입해 기지를 현대화하고, 2035년까지 차세대 라팔 전투기 40대를 추가 배치하겠다고 밝혔다. 새로 배치할 라팔 전투기에는 사거리가 기존의 두 배인 960㎞에 달하는 초음속 핵미사일이 탑재될 예정이다.
美, 냉전 이후 동맹에 대한 핵우산 정책 유지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전, 조 바이든 대통령 집권 당시 미국은 비핵보유 동맹국이 적대 세력의 핵 공격으로부터 위협받지 않도록 미국의 핵 전략자산으로 이들을 보호하는 이른바 '핵우산 정책'을 전개했다. 미국의 핵우산을 제공받는 국가는 NATO 회원국을 비롯해 한국·일본·호주 등 30여 개국에 달했다. 이 정책의 핵심 취지는 동맹국에 대한 핵 공격이 발생할 경우 미국은 예외 없이 핵 보복에 나설 것이라는 '전략적 분명성'을 바탕으로 핵 사용 결정을 사전에 억지하고 차단하는 것이다. 그동안 미국은 이러한 기조를 근거로 각 동맹국이 처한 지정학적 특수성과 시대적 환경을 적극적으로 반영해 맞춤형 핵우산을 제공한다는 원칙을 유지해 왔다.
대표적인 대상은 NATO 회원국이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구소련 등 공산권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1953년 7월 NATO 회원국에 핵무기 배치를 약속했고, 1966년 미국과 NATO는 핵 공유 협의 기구인 '핵기획그룹(NPG)'을 창설했다. 당시만 해도 핵우산의 개념이 모호했지만, 1968년 6월 UN 안보리 결의 제255호에서 '적극적 안전보장(Positive Security Assurance)' 개념이 정립되면서 점차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미국와 NATO는 핵우산 관련한 별도의 공식 문건을 만들지는 않았으나 NPG를 통해 핵공유 전략을 발전시켜 왔다. 이후 NATO에 대한 미국의 핵우산 정책은 1990년 냉전 체제 붕괴 이후 약화했다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일본 역시 1951년 9월 8일 미·일 안전보장조약에 근거해 미국의 핵우산 보호를 받고 있다. 이후 1957년 7월 주일 미군사령부가 창설되고, 1960년 신(新)안보조약으로 공동방위 체제가 강화됐다. 그러나 양측은 핵우산을 공동성명에 넣거나 이와 관련한 별도 문건을 명문화하지 않았다. 그러다 북한이 2006년 1차 핵실험, 2009년 2차 핵실험을 감행하며 동북아시아 내 북핵 위기가 고조되자, 미·일 간 핵우산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논의가 본격화됐다. 이에 2010년 미·일 확장억제 대화(EDD)가 양국 외교부·국방부 간에 처음으로 개최됐다. 최근 일본은 북한뿐 아니라 중국의 핵·미사일 위협까지 고려해 핵우산을 강화해 줄 것을 미국 측에 요구하는 상황이다.
호주는 1990년대부터 미국과 핵우산 논의를 본격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대호주 핵우산 제공은 오래전부터 공공연하게 거론됐지만, 공식적으로는 1994년 호주 국방백서에서 처음으로 명시됐다. 그러나 NATO, 일본 등과 같이 NPG 협의체를 만들거나 별도의 협의 문건을 공식 발표한 적은 없다. 이는 지정학적으로 볼 때 호주가 다른 국가에 비해 직접적인 핵 위협에 직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년 전부터 중국의 군사적 팽창이 가속화하면서 미국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오커스(AUKUS) 동맹을 체결한 호주에 대한 핵전략 지원을 강화하기로 했다. 미국이 지난해 호주에 핵 추진 잠수함 수 척을 제공하고 건조 기술도 전수해 주기로 발표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트럼프 發 불확실성에 韓·中·日 공조 모색
한국과 일본은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와 핵우산 정책 약화에 대응해 중국과의 결속을 강화하는 모양새다. 전문가들은 오랜 기간 미국의 핵우산에 의존해 온 동아시아 국가들이 트럼프 대통령이 촉발하는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에 직면하면서 한국, 일본, 중국 주요 3국 사이에 기묘한 안정감이 연출되고 있다고 분석한다. 한·중·일이 발 빠르게 손을 맞잡는 모습은 지난 21∼22일 일본 도쿄에서 조태열 외교장관, 왕이 중국 공산당 중앙외사판공실 주임 겸 외교부장, 이와야 다케시 일본 외무상이 잇따라 개최한 양자·3자 회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중·일 외교장관 회의는 지난 2023년 11월 부산에서 열린 이후 1년 4개월 만에 재개됐다. 이번 회의는 겉으로는 한·중·일 외교장관들이 만나 통상적 협력 필요성 등을 확인하는 자리로 보이지만, 그 속내에는 보다 전략적인 계산이 깔려 있다. 한국과 일본이 나란히 국내 정치적 난관에 직면한 상황에서 미국과의 동맹에 불안을 느끼자, 중국과의 관계 강화가 점차 중요한 외교적 선택지로 떠오르고 있다는 평가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도 "한·중·일 3국이 결속을 강화하는 배경에는 트럼프 행정부가 국제 사회에 만들어내는 불확실성이 있다"고 풀이했다.
조 장관도 지난 22일 한·중·일 외교장관 회의 뒤 가진 공동 기자회견에서 "세 나라가 협력을 제도화하고, 각국 국민들이 체감하도록 일상과 연계된 사업에 초점을 맞춰 실질 협력을 심화해 나가기로 했다"며 "이를 위해 한·일·중 정상회의가 정례 개최돼 협력의 흐름이 중단되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조 장관은 최근의 한반도 정세와 관련해 "불법적 러·북 군사협력이 즉각 중단돼야 한다"며 "이번 회의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과정에 북한이 잘못된 행동에 대해 보상 받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왕이 부장은 지역 정세 안정을 위한 3국 협력을 강조했다. 그는 "국제 정세가 급변하고 세계 경제 회복이 부진한 가운데 3국 간 소통 강화·신뢰 증진·협력 심화를 통해 지역 평화와 발전에 안정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며 "역내 경제 통합을 촉진하는 데에도 합의했다"고 밝혔다. 이와야 외무상은 연내 개최를 추진 중인 한·중·일 정상회의에 대해 "적절한 시기에 개최하기 위해 작업에 속도를 내기로 의견을 모았다"며 북한과 관련해서는 UN 안보리 결의에 따른 비핵화가 공동이 목표인 만큼 이를 완전하게 이행하도록 긴밀히 소통하기로 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