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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농업 수출 관련 제재 해제 조건 제시 美, 러 농산물·비료 수출 제재 일부 복원 에너지 시설 휴전 합의도 이행 방안 협의

우크라이나 전쟁의 휴전 방안을 도출하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미국과 개별 회담을 진행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북해에서의 해상 휴전에 합의했다. 러시아는 흑해 휴전의 조건으로 국영 농업은행의 국제결제시스템 연결과 비료·식품 수출에 대한 제재가 해제돼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제시했지만, 정확한 휴전 조건과 시점 등에 관해서는 이견이 노출돼 실제 휴전까지는 난항이 예상된다.
美, 에너지·해양 휴전 합의 이행에 중재 나서기로
25일(이하 현지시각) 우크라이나 국방부는 성명을 내고 지난 23일부터 3일간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진행된 미국과 러시아, 미국과 우크라이나 간 고위급 대표 회담을 통해 흑해에서의 무력 사용을 중단하는 데 합의했다고 밝혔다. 성명에 따르면 교전 당사국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흑해에서의 안전한 항해를 보장하고, 무력 사용을 배제하며, 상선이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되지 않도록 하는 데 동의했다. 이와 함께 상대국의 에너지 시설에 대한 공격을 상호 금지하고 이를 이행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기로 했다.
특히 양국은 에너지 및 해양 분야 합의의 이행을 도울 '제3국'의 중재를 수용하기로 했는데 여기서 제3국이란 미국을 의미한다. 세 나라의 합의에 따라 미국은 전쟁 포로의 교환, 민간인 억류자 석방, 강제 이주 당한 우크라이나 아동의 귀환 등에 대해서도 지원하기로 했다. 미 백악관도 보도자료를 통해 "미국과 러시아는 흑해에서의 무력 사용을 배제하는 데 합의했다"며 "또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에너지 시설에 대한 상호 공격을 금지한 지난 18일 미·러 정상 간 합의 이행을 위한 조치를 마련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우크라이나와 미국에 이어 러시아도 합의 사실을 공식 발표했다. 같은 날 크렘린궁은 성명을 내고 "에너지·해양 분야에서 합의 시행을 지원할 제3국 중재를 환영한다"며 "러시아와 미국은 흑해 내 안전한 항해 보장·무력 사용 금지·상선의 군사 목적 사용 금지와 이를 감시하기 위한 적절한 통제 조치의 수립을 포함하는 흑해 협정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있는 에너지 시설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기로 한 30일 간의 제한적 휴전 조치에 대한 세부 사항을 논의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러시아 농업은행 제재 해제 등, 전제 조건 내걸어
다만 러시아 측은 흑해 휴전의 합의 이행에 앞서 전제 조건을 내걸었다. 러시아 국영 농업은행(로셀호스)과 러시아 선적 선박, 러시아 식품 생산·수출업자 등에 대한 제재가 해제되고 식품·비료 관련 금융기관이 국제 결제 시스템인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에 다시 연결돼야만 합의 결과를 이행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도 25일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흑해곡물협정을 재개하려면 미국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명령해 이를 보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22년 7월 체결된 흑해곡물협정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도 불구하고 흑해를 통한 우크라이나 곡물의 안전한 수출을 보장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 협정은 당시 우크라이나 전쟁이 초래한 글로벌 식량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로 UN(국제연합)과 튀르키예의 중재를 통해 성사됐다. 그러나 이듬해 7월 러시아는 러시아산 식량과 비료 수출 보장에 대한 조항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다며 1년 만에 협정을 파기했다. 특히 러시아는 국영 농업은행에 대한 서방의 제재가 자국의 농업 수출을 심각하게 저해했다고 주장해 왔다.
이번 협상의 당사국으로 개별 회담을 진행한 미국은 일단 대러시아 제재 강도를 일부 완화할 계획이다. 미 정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대러 제재 완화는 러시아산 농산물과 비료의 글로벌 시장 접근성을 회복하고, 해상 보험 비용을 낮추며 항만 및 결제 시스템에 대한 접근성을 강화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이를 휴전의 조건으로 명시하지는 않았다. 반면 유럽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지속해 온 대러 제재 효과가 약화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러시아의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결국 제재 완화로 이어질 것이란 지적이다.
협정 발효 시점, 적용 대상 등도 세 국가 간 이견
협상에 나선 당사국 세 나라 모두 큰 틀에서 보면 비슷한 입장을 발표했지만, 러시아가 협정 이행을 위한 조건을 내걸면서 합의 발효 시점을 두고 이견을 보이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협정 합의의 효력은 즉시 발생하는 것"이라며 "러시아가 합의를 어기면 트럼프 대통령에게 무기와 제재를 요청하겠다"고 강조했다. 이는 러시아가 합의를 위반할 경우 어떤 조치가 취해져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 합의에서 빠진 점을 지적한 것으로 풀이된다.
러시아가 협상을 조건으로 추가적인 제재 해제를 요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번에 러시아가 제시한 금융 제재 완화 요구가 받아들여진다면, 이는 서방이 유지해 온 대러 제재 체제에 중요한 후퇴를 의미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엘리나 리바코바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 선임 연구원은 "러시아는 단순히 농산물 수출량 증가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서방의 제재 체제 자체에 균열을 내려고 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일각에서는 휴전 협정이 미국의 계획대로 흘러가지 못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에너지 시설 전투 중단에도 합의했지만, 이 또한 휴전 시점에 대해서는 미묘한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측은 우크라이나 에너지 시설 공격 금지에 관한 세부 조처를 개발할 것이라면서도 정확한 중지 시점이나 대상 시설을 공개하지 않았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흑해와 마찬가지로 25일 에너지 인프라에 대한 휴전도 발효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러시아는 에너지 시설에 대한 전투 중지 합의는 지난 18일부터 30일간 유지된 것이라고 명시했다. 또한 협정 기한은 상호 동의 하에 연장될 수 있지만, 한쪽 당사자가 약속을 파기하면 상대방은 협정을 준수할 의무가 없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단서를 달았다. 공격 중단의 대상이 되는 에너지 시설 목록도 러시아만 공개했는데 여기에는 정유소, 석유·가스 파이프라인, 전력 생산과 송전 관련 시설, 원자력 발전소, 수력발전 댐 등이 포함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