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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ESTA 남용 차단 위해 입국 심사 강화, ·취소 사례도 발생 삼성·LG 등 대기업 출장자도 무더기 입국 거부로 발길 돌려 취업비자 제한 속 출장 차질, 비자 심사도 한층 까다로워져

미 정부가 관광·출장용 전자여행허가제(ESTA)의 상시적 남용에 제동을 걸면서 국내 대기업의 미국 현장 인력 운영에 큰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최근 LG에너지솔루션과 현대차, 삼성전자 등 주요 기업 엔지니어들이 공장 점검과 생산라인 구축을 위해 미국에 입국하려다 ESTA 사용 이력으로 무더기 입국 거부를 당했다. H-1B 등 정식 취업 비자 발급이 어려운 상황에서 기업들은 출장과 현지 근무 계획을 전면 재검토하는 실정이다.
90일짜리 취업비자 ESTA, 잇따른 입국 거부
18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미국 미시간 홀랜드 공장에 생산라인을 설치·점검하기 위해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 도착한 LG에너지솔루션 엔지니어가 무더기로 입국을 거부당했다. 미국 세관은 이들이 과거 ESTA로 90일 가까이 체류한 이력을 지적하며 별도 비자를 받으라고 통보했다. 현대자동차의 기술 인력도 비슷한 이유로 지난달 애틀랜타 하츠필드잭슨 공항 문턱을 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는 잇따른 입국 거부에 “ESTA로 출장 갈 경우 2주 안에 돌아오라”고 공지를 띄웠다.
미국은 관광이나 단기 출장 등을 위해 허용한 ESTA가 사실상 ‘90일짜리 취업비자’로 활용된다고 판단해 올해 들어 입국심사를 강화했다. 합법적으로 미국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전문직에게 발급되는 H-1B 비자 등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매년 발급되는 H-1B 비자 수에 엄격한 상한이 있어 실제 발급률은 10%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H-1B 비자는 연 발급 건수를 85,000건으로 제한하는 데다 이 중 20,000개는 미국 내 석사 이상 학위자의 몫으로 배정된다. 한국인의 경우 H-1B 비자를 연 인원이 2,000명 수준에 불과하다.
이처럼 H-1B 등 취업비자 획득 과정에서 상당수 지원자가 탈락하는 데다 절차가 복잡하고 비용과 시간이 많이 소요되다 보니 관광이나 단기 출장 목적으로 허용된 ESTA를 활용해 미국에 입국한 뒤, 실제로는 현지에서 단기 근무나 원격 근무 등 사실상 취업에 준하는 활동을 시도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하지만 ESTA는 원칙적으로 관광 또는 비즈니스 출장(회의, 상담, 계약 협상 등)만 허용하며, 미국 내에서의 실질적 근로는 엄격히 금지돼 있다.
美 세관·국토부, 승인된 ESTA도 무효 처리
미 정부가 ESTA 남용에 대한 단속을 대폭 강화하면서 최근에는 ESTA가 승인된 이후에도 취소되는 사례가 크게 늘고 있다. 미 국토안보부(DHS)와 세관국경보호국(CBP)은 신청자의 신상정보, 방문 이력, 각종 데이터베이스를 실시간으로 교차 확인하며, 새로운 정보가 드러나면 승인된 ESTA라도 언제든 취소할 수 있다. 업계에 따르면 올해 들어 반복적인 단기 방문이나 근로 목적 의심, 과거 입국기록과의 불일치 등이 발견돼 출국 직전 혹은 항공사 체크인 단계에서 ESTA가 갑자기 무효 처리되는 일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ESTA를 둘러싼 혼란 속에 조(兆) 단위 투자금을 들여 미국 현지에 공장을 짓거나 운영 중인 삼성, SK, 현대자동차, LG 등 국내 대기업들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한국의 생산 노하우를 이식하기 위해서는 경험 많은 한국 직원들이 직접 현지 공정 세팅 등을 하는데, 전문직 취업 비자(H-1B)나 주재원 비자(L1·E2), 단기 상용 비자(B1) 등을 발급받는 건 사실상 ‘하늘의 별 따기’다. 더욱이 CBP 등은 ESTA만으로 수십 일 체류한 전력이 있는 엔지니어를 대상으로 출입국 기록과 숙소 등을 면밀히 따져보기 시작하면서 공장 인근에 장기간 머무른 한국 기업인 상당수가 사실상 입국 거부자 리스트에 오른 것으로 전해졌다.
ESTA의 갑작스러운 취소는 실제 여행을 하려는 개인의 일정에도 큰 혼란을 초래한다. 이미 항공권과 호텔을 예약한 상태에서 출발 당일 ESTA가 무효화됐음을 통보받아 여행 전체가 무산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특히 기업 출장이나 현지 프로젝트에 참여하려던 임직원들이 단체로 ESTA 취소 통보를 받는 경우도 있어, 국내 기업들은 미국 출장 계획을 전면 재검토하는 실정이다. 실제로 2025년 6월 기준, 국내 주요 기업들은 임직원 대상 미국 출장 시 ESTA 남용 방지와 관련한 내부 지침을 강화하고 있다.
온라인 활동까지 검증, 비자 발급도 어려워져
미 정부의 입국 규제 강화로 비자발급 자체도 어려워졌다. 지난 18일 미 국무부가 일시 중단했던 외국인 유학생 및 연수생 비자 발급 절차를 재개한다고 밝혔지만, 실제로 비자 심사 기준은 한층 더 엄격해졌다. 미국 정부는 학생 비자 신규 신청자에게 모든 소셜미디어(SNS) 계정의 공개를 요구하고, 이를 거부할 경우 비자 발급이 거부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새 가이드라인에 따라 영사업무 담당자들은 모든 학생 및 교환 방문 비자 신청자에 대해 종합적이고 철저한 심사를 진행한다는 방침이다.
이 같은 강화된 심사 절차는 단순히 SNS 계정 공개 여부만이 아니라, 신청자의 온라인 활동 전반과 과거 이력, 방문 목적 등에 대한 다층적 검증으로 이어지고 있다. 미국 국무부는 "강화된 SNS 검토는 우리나라를 방문하려는 모든 사람에 대해 적절히 심사할 수 있게 할 것"이라며, 비자 신청자들에게 프라이버시 설정을 '공개'로 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미국이 외국인의 과거 SNS 게시물까지 비자 거부 사유로 삼을 수 있음을 공식화한 것으로, 비자 발급 자체가 과거보다 훨씬 어려워졌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학생 비자에 국한되지 않는다. 실제로 미국 비자 발급을 준비하는 많은 이들은 "비자 심사 기준이 갈수록 까다로워지고, 언제든 추가 서류 제출이나 인터뷰 요구, 심지어 거절까지 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호소하고 있다. 미국행을 준비하는 학생, 연구자, 기업인 모두가 비자 취득 자체가 점점 더 높은 장벽이 되고 있다는 현실을 실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