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내려라” 식품업계 물가 억누르는 정부, 풍선효과 우려 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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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 제품 가격 인하한 제당사, 정부 압박 못 이겼다
부처 장관까지 직접 나서서 '물가 안정' 주문해
'MB식' 물가 정책 채택한 정부, 시장서는 부작용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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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당사 등 국내 식품 기업들이 주요 제품 판매 가격을 줄줄이 인하하고 있다. 각 부처 장관 등 고위 인사의 현장 방문이 급증하며 물가 인하 압박이 가중된 결과다. 정부가 ‘물가 억누르기’ 정책에 점차 힘을 싣는 가운데, 시장에서는 정부 주도의 무리한 물가 조정이 오히려 역효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국내 제당사, 줄줄이 가격 인하 결정

4일 식품업계에 따르면 CJ제일제당, 삼양사, 대한제당 등 국내 주요 제당사들은 이달 1일부터 원재료 가격 하락을 반영해 기업 간 거래(B2B)에 공급하는 설탕 제품 가격을 약 4% 내렸다. 설탕 원재료에 해당하는 원당 국제 거래가는 지난 2022년 6월 1톤당 424달러에서 지난해 11월 602달러(약 83만원)로 42% 급등했으나, 이후 완만한 하향곡선을 그리며 이달 다시 420달러 선까지 미끄러진 바 있다.

설탕은 빵, 과자, 아이스크림, 초콜릿 등 대부분의 가공식품에 활용되는 주요 식재료다. 제당사가 B2B 시장 내에서 설탕 가격을 인하하면 가공식품 물가 전반이 가라앉을 수 있다는 의미다. 정부는 이 같은 점을 고려해 올해 초부터 꾸준히 제당사를 포함한 식품업계에 강력하게 가격 인하를 권고해 왔다.

일례로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3월 서울 서초구 농협하나로마트 양재점을 방문한 자리에서 “과도한 가격 인상 담합 등 시장 교란 행위와 불공정 행위에 엄정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했다. 이후 공정거래위원회는 CJ제일제당, 삼양사, 대한제당 등에 조사관을 보내 현장 조사를 진행했다.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역시 지난달 25일 대한제당 공장을 방문해 “원당 국제 가격 하락분이 국내 제품 가격에 반영될 수 있도록 협조해달라”고 강조했다. 시장에서 정부의 전방위적인 압박이 국내 제당사들의 가격 인하를 이끌어냈다는 평이 흘러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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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물가 조정 압력

이 같은 정부 차원의 ‘가격 인하’ 압박은 지속 심화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정부는 농식품부는 소비자의 가격 민감도가 높은 7개 품목 물가를 집중적으로 관리하는 태스크포스(TF)를 만들기로 했다. 당시 정부는 회의에서 “물가 가중치가 높고 서민 체감도가 높은 빵, 과자, 커피, 라면, 아이스크림 등 가공식품과 국제 가격 상승세가 유지되고 있는 설탕 등 주요 품목에 대해 담당자를 지정할 계획”이라며 “(이를 통해) 시장 동향을 수시 점검하고 (업계와의) 소통을 강화하겠다”고 했다.

정부는 전담 공무원이 지정되지 않은 주요 품목의 경우 소관 부처 차관을 물가안정책임관으로 지정, 물가 안정에 총력을 다하겠다는 구상을 제시했다. 해당 방안 발표 이후 각 부처 차관은 정부가 민생 안정의 핵심 과제로 ‘현장 중심의 물가 대응’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을 고려, 각 현장을 방문해 물가 안정을 독려하고 나섰다.

주목할 만한 부분은 최근 들어 차관을 넘어 각 부처 장관 등 고위 인사가 직접 현장을 방문해 가격 인하 압력을 가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농식품부 송미령 장관의 경우 최근 각 현장을 돌며 물가 안정 협조를 요청하고 있다. (송 장관이) 올해 물가 현장을 방문한 사례만 50건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장관급 인사가 직접 목소리를 내며 외식업계, 식품업계 등을 중심으로 정부 압박이 거세지는 추세”라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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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당 인천제당공장에 방문한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사진=농림축산식품부

일각에서는 ‘역효과’ 우려도

시장에서는 이 같은 현 정부의 물가 안정 정책이 지난 2012년 실패로 돌아간 ‘MB식 물가 관리제’와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실제 이명박 전 대통령은 19대 총선을 앞둔 2012년 1월 국무회의에서 농·축산물을 중심으로 담당 공무원이 품목별 물가 관리의 목표를 정해 서민 경제를 안정시키도록 하는 ‘물가 관리 책임 실명제’ 도입을 주문했다. 이는 품목별 전담 공무원 지정 등을 앞세운 현 정부의 물가 안정 정책의 ‘전례’인 셈이다.

당시 이명박 정부의 노력은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전년 동월 대비 물가상승률은 2012년 1월 3.3%, 2월 3%, 3월 2.7% 등 꾸준히 하락했으며, 총선이 진행된 4월엔 2.6%까지 미끄러졌다. 그러나 경제 전문가들은 당시 물가 관리 책임 실명제가 물가상승률 하락에 미친 영향은 사실상 미미했다고 본다. 당시의 물가 하락세는 이명박 정권 집권 초기에 발생한 글로벌 금융위기 등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던 만큼, 해당 정책은 사실상 실패했다는 평가다.

만약 현 정부의 물가 정책이 물가 관리 책임 실명제의 전철을 밟을 경우, 차후 국내 시장은 안정되기는커녕 무리한 가격 조정으로 인한 ‘역풍’을 맞을 가능성이 크다. 슈링크플레이션‧스킴플레이션 등 물가 억제의 부작용이 소비자 혼란을 가중할 수 있다는 의미다. 슈링크플레이션은 슈링크(shrink, 양을 줄인다)와 인플레이션(inflation)의 합성어로, 기업이 가격을 유지하며 제품 용량을 줄여 교묘하게 비용을 절감하는 것을 의미한다. 스킴프(skimp, 아끼다)와 인플레이션의 합성어인 ‘스킴플레이션’은 기업이 재료나 서비스 등에 투입하는 비용을 줄이는 현상을 뜻하는 용어다.

정부의 압박에 눈치를 보던 기업들이 추후 한꺼번에 가격 인상에 나서게 되면 ‘스테그플레이션(고물가 속 경기 침체)’의 역풍이 불어닥칠 위험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문가는 “정부가 무작정 물가를 누른다고 상승 압력이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각 업계가 원재료 가격 상승 부담에 짓눌리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며 “부작용 위험이 큰 ‘핀셋형’ 물가 억제 대신 통화 정책을 통한 전반적인 물가 안정을 고민해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