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거래소, 상장폐지 절차 개선해 ‘좀비기업’ 퇴출 추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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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실 상장사 42.4%, 한계기업도 17.5%에 달해
금융당국 "투자금 묶인 좀비기업 퇴출해 밸류업"
불공정거래 단속 강화, 상폐 절차 간소화 등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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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게티이미지뱅크

금융당국과 한국거래소가 거래가 정지됐음에도 상장 폐지되지 않은 채 시장에 남아있는, 이른바 ‘좀비기업(한계기업)’의 퇴출을 추진한다. 좀비기업들은 거래 정지 조치 후에도 이의 제기 등의 절차를 통해 퇴출을 지연시켜 왔는데 이 과정에서 부실 상장사에 투자금이 묶여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주식 저평가)가 심화한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이에 한국거래소는 부실 상장사의 퇴출 관련한 제도를 개선하기로 했다.

거래 정지된 좀비기업 97개, 상폐 비율도 22%에 불과

3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달 31일 기준 상장 폐지 사유 발생 등의 이유로 거래가 정지된 종목은 코스피(유가증권) 시장 21개, 코스닥 시장 76개로, 총 97개로 집계됐다. 이 중 거래정지 기간이 1,000일(2021년 8월 31일 이후)을 넘은 기업은 10곳이나 됐다. 스팩(SPAC·기업인수목적회사), 주식 액면 분할 등으로 인한 단기 거래정지는 제외한 수치다.

부실 상장사 수도 증가하고 있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기준 1,674개의 상장사 가운데 ‘이자보상배율이 1 미만인 기업’은 710개로 집계됐다. 전체 상장사 대비 비중은 42.4%로 전년 대비 8.1%p 증가했다. 이는 코로나19 팬데믹이 본격화한 2020년 3분기 39.9%보다도 높은 수치다. 3년 연속 이자보상배율이 1 미만인 ‘한계기업’의 비중도 2022년 기준 17.5%를 기록했다. 이자보상배율은 영업이익을 이자로 나눈 값으로, 1을 넘지 못할 경우 기업이 영업활동을 통해 벌어들인 수익으로 채무를 상환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행 제도에 따르면 한계기업 등 부실 상장사에 대한 상장 폐지가 결정되더라도 해당 기업이 이의를 제기할 경우, 절차가 한없이 지연된다. 다만 절차를 통해 가까스로 거래가 재개된다고 해도 정상화되는 사례는 거의 없는 데다 대부분 또다시 상장 폐지되는 경우가 많다. 매년 좀비기업이 증가하면서 여기에 묶인 투자금도 늘어나고 있다. 이 때문에 부실기업이 제때 퇴출당하지 않으면서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로 주요국과 비교해 보면 한국은 유독 부실 상장사 퇴출이 활발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미국 뉴욕거래소나 나스닥 시장은 국내 증시보다 15배 이상 크지만, 상장사 수는 2배밖에 차이 나지 않는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시가총액을 기준으로 보더라도 국내 상장사의 수가 많은 편이다. 이에 반해 퇴출 기업의 수는 적다. 지난해 국내 증시에 신규 상장된 기업은 119개, 상장 폐지된 기업은 27개로 진입한 회사 대비 퇴출당한 회사의 비율은 22.7%에 그쳤다. 이는 미국 146.2%, 일본 72.7%에 비해 매우 낮은 수치다.

금감원, 상폐기업부터 진입 단계 기업까지 전방위 조사

이에 금융당국은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한 기업 ‘밸류업’ 과제의 하나로 좀비기업 퇴출을 꼽고 단속을 강화했다. 지난 3월 25일 금감원은 자본시장 조사·공시·회계 부서 합동 대응체계를 마련해 상장폐지를 회피하기 위한 불법 행위를 연중 집중조사한다고 발표했다. 현재 상장폐지 기업, 상장폐지 위기를 겪고 있는 기업, 상장폐지 위험을 피한 기업, 상장 진입 단계 기업 등을 전방위로 들여다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함께 상장 폐지를 회피하기 위해 불공정거래를 자행하는 종목을 비롯해 이미 상장 폐지된 기업에 대해서도 집중 조사를 벌이고 있다. 금감원은 최근 3년간 실적 악화 등을 이유로 상폐된 기업 44개 중 37개에서 시세조종, 미공개 정보 활용 등 불공정거래를 적발했다. 이 중 조사와 조치를 완료한 15개 사의 부당이득 규모는 총 1,694억원에 달한다.

상장 진입과 관련된 불공정거래도 단속하고 있다. 신규상장을 위해 분식회계, 이면계약 등으로 덩치를 부풀린 기업을 잡아내겠다는 취지다. 금감원은 “상장 당시 추정한 매출액 등 실적 전망치가 실제 수치와 크게 차이 나는 경우 전망치 산정의 적정성 등에 대해 면밀히 분석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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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보 한국거래소 이사장이 5월 24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한국거래소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거래소의 핵심 전략을 소개하고 있다/사진=한국거래소

상장은 쉽지만 폐지는 어려운 韓 주식시장

이런 가운데 거래소는 한계기업 퇴출을 위한 제도 개선 방안도 마련한다. 지난달 16일 정은보 거래소 이사장은 이복현 금감원장과 함께 미국 뉴욕에서 열린 민관 합동 투자설명회(IR)에 참석해 밸류업 프로그램을 강조하면서 좀비기업의 퇴출을 통한 옥석 가리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달 24일 열린 취임 100일 기자간담회에서도 “좀비기업이 퇴출당하지 않고 상장을 유지하면 투자금이 계속 묶여 있어 그 피해가 고스란히 투자자에게 돌아간다”며 “우량 혁신기업은 증시에 쉽게 진입하고 좀비·부실기업은 적시에 퇴출하겠다”고 강조했다.

정 이사장은 이어 “거래소는 이미 퇴출과 관련된 제도 개선을 위해 검토를 시작했다”며 “필요하다면 용역을 발주해 진행되는 과정에서 여러 의견을 수렴하고, 정책당국과의 협의 과정도 거쳐 원칙에 맞게 상장 기업의 퇴출을 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 나가도록 하겠다”고 설명했다.

이날 정 이사장의 발언은 시장 진입 요건에 비해 상장 폐지 요건이 지나치게 낮다는 지적을 고려해 퇴출이 쉽도록 하겠다는 구상으로 풀이된다. 이에 따라 거래소는 코스피 시장의 상장 폐지 절차에 소요되는 기간을 기존 최장 4년에서 2년으로 줄이고 코스닥 시장 상장 폐지 절차는 3심제에서 2심제로 단축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