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포럼] 다자간 협력 없는 글로벌 공급망 개편은 헛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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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급망 위기 원인 다각적인데 자국 우선주의까지 가세
미중 갈등이 세계 경제 및 공급망 파편화 '영속화'
상호 협력 통한 일관성 있는 정책 대응 전제돼야

[동아시아포럼] 섹션은 EAST ASIA FORUM에서 전하는 동아시아 정책 동향을 담았습니다. EAST ASIA FORUM은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학교(Australia National University) 크로퍼드 공공정책대학(Crawford School of Public Policy) 산하의 공공정책과 관련된 정치, 경제, 비즈니스, 법률, 안보, 국제관계에 대한 연구·분석 플랫폼입니다. 저희 폴리시 이코노미(Policy Economy)와 영어 원문 공개 조건으로 콘텐츠 제휴가 진행 중입니다.


최근 기후 변화 대응, 코로나19, 정치 상황의 변화 등에 따라 각국의 공급망 재편 움직임이 가속화하고 있다. 미중 갈등, 생산 및 공급의 자국 집중 증가, 필수 자원에 대한 특정 국가 의존, 각국 무역 패턴의 변화 등도 글로벌 공급망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 요인으로 지목된다. 세계 각국은 이러한 패러다임 변화에 보다 협력적이고 일관성 있게 대응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China: Visitors Visit the 2024 World Semiconductor Congress in Nanjing
사진=동아시아포럼

각국 정치적·경제적 고려로 다자간 협력 난항

글로벌 공급망 조정은 다면적이고 복합적인 원인으로 시작됐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기후 변화, 자동화, 지정학적 갈등 고조 등은 기업들의 글로벌 유통망 및 무역 패턴의 재구축을 부추겼다. 각각의 이슈만으로도 공급망 안정화가 어려운 상황에서 개별 국가가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를 더 복잡하게 하는 건 공급망 재편에 정치적 계산이 작용한다는 점이다. 각국 정부는 안정적이고 지속 가능한 공급망 구축을 지향하면서도 정치적 함의가 있는 사안에는 말을 아낀다. 환경 파괴와 노동 착취를 시정하거나, 중요 자원과 부품 공급을 적대국에 의존하지 않는 등의 명제, 해외 생산시설의 자국 복귀와 같은 민감한 문제들이 대표적이다. 이 모든 사안들은 공급망 구조조정 시 고려해야 할 요소들이다.

공급망 현황 지표인 무역 패턴이 최근 들어 크게 변화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지난해 조사에 따르면 글로벌 소매 및 제조업체 67%가 공급업자를 교체했고 3분의 2는 지속적으로 바꿔 나갈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현재 거래국이 아닌 타국 업체로 변경하거나 자국 업체로 전환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미국 경영 컨설팅기업 커니(Kearney)의 2024년 리쇼어링 지수(Kearney 2024 reshoring index report) 보고서에 따르면 북미 기업들이 자사 생산 시설을 저비용 아시아 국가에서 자국으로 옮기는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이에 따라 지난해 미국의 14개 아시아 국가 수입액은 전년 대비 1,430억 달러(약 196조원) 줄어든 8,780억 달러(약 1,203조원)에 그쳤다.

코로나19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이 공급망 위기 키워

공급망 재편에 본격적으로 속도가 붙은 데는 코로나19 봉쇄 조치의 영향이 컸다. 전 세계적인 봉쇄로 인해 기존 공급망이 단절된 데다 그간 신성시했던 ‘적시(just-in-time) 공급망 방식’이 약점을 드러내면서다. 유럽 중앙은행(ECB)에 따르면 2020년 11월부터 2021년 9월까지 팬데믹에 의한 공급망 붕괴가 없었다면 세계 무역 규모는 2.7%, 생산 규모는 1.4% 더 높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기가 공황을 부르듯 당시 각국 정부의 코로나19 초기 대응은 되려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각국의 국경 봉쇄가 팬데믹 대처에 필수적인 의약품, 의료품, 서비스 등의 이동을 어렵게 했기 때문이다.

2022년 들어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 및 동맹국들의 대응 조치 탓에 각국은 석유, 가스, 곡물, 비료, 철, 철강, 핵심광물 등의 대체 공급원이 절실해졌다. 특히 서방국의 제재로 인해 기존 거래 시장이 막힌 러시아 기업들은 중국, 인도, 브라질 및 기타 신흥국으로 경로를 전환해 원자재들을 확보했다. 공급망 전환은 대부분 대체가 용이한 상품들에 한해 이뤄졌다. 유럽이 러시아로부터의 가스 수입을 끊고 신속히 미국 등의 액화천연가스(LNG) 수입으로 대체한 것이 대표적 예다.

하지만 첨단 기술로 갈수록 온쇼어링(해외 공장 자국 내 유치)과 프렌드쇼어링(동맹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이 복잡해졌다. 조 바이든 행정부가 대규모 세수를 동원한 인플레이션감축법(Inflation Reduction Act, IRA)과 칩스법(반도체 지원법, CHIPS and Science Act)을 제정한 것도 이 같은 공급망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미국 정부의 가장 큰 우려는 대만의 TSMC가 전 세계 첨단 반도체 공급의 61.2%를 차지할 정도로 각국이 한 곳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기차 진흥 정책 역시 전기차와 배터리 생산 및 공급망 중심이 중국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됐다.

미중 갈등과 상호 견제가 공급망 파편화 가중

기업들이 생산 기지와 공급망 이전을 고민하는 또 다른 요인은 고조되는 지정학적 긴장 관계다. 경제학자 사이먼 이브넷(Simon Evenett)은 세계경제포럼(WEF) 기고문에서 2023년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제출 자료를 분석한 결과 글로벌 기업들의 75%가 지정학적 갈등을 사업 의사 결정 및 리스크 평가의 최우선 고려 사항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미중 갈등은 양국 경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데다 다음 제재 조치를 예상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기업들의 불안을 가중시킨다. 여기에 미국이 WTO(세계무역기구) 규정을 준수하지 않는 점도 기업들이 투명하고 예측 가능한 사업환경에서 활동하기 어렵게 한다. 미국은 인공지능(AI), 첨단 반도체 칩, 양자컴퓨터 등의 중국 수출에 제한을 가하면서도 철강, 전기차, 태양광 패널 등 중국산 수출품에 대해서는 수입 규제를 적용했다. 이 같은 규제 기조는 자국에만 국한돼 있지 않다. 미국은 동맹국들에도 대중국 제재 강도를 미국 수준으로 높이도록 압박하고 있다. 미국은 유럽 국가들에 중국 제품 수입을 줄이라고 하는가 하면 네덜란드와 일본에는 중국에 첨단 리소그래피(lithography, 반도체 기판에 회로를 새겨 넣는 기법) 장비 수출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그 결과 미중 무역 규모는 크게 감소했다. 미국의 대중국 수출액은 2022년 1,540억 달러(약 210조원)에서 2023년 1,480억 달러(202조원)로 줄어들었다. 중국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중국의 대미 수출액은 2022년 5,360억 달러(약 733조원)에서 지난해 4,270억 달러(약 584조원)로 미국보다 더 큰 감소폭을 기록했다. 현재 미국은 줄어든 중국 수출 물량 대부분을 멕시코, 태국, 베트남 등에서 메우고 있다. 한편 중국과 러시아의 교역은 급성장했다. 2020년 이후 러시아는 중국의 9위 교역 상대국에서 5위로 수직 상승했고, 지난해 양국 교역 규모는 26% 성장한 2,400억 달러(약 328조원)에 이른다.

WTO 등 국제기구들의 이해 조정 기능에도 의구심 커져

각국이 내세우는 공급망 재편의 명분은 ‘국가 안보’라는 불분명한 개념이다. 미중 갈등에 따라 세계 경제가 파편화되면서 각국은 국제 규약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국가 안보를 내세우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하지만 각국 정부의 다양한 대응 원인을 하나의 기준으로 일반화하는 것은 공급망 재편의 근본적 원인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즉 개별 문제에 맞춘 정책 대응이 필요한데, 현실에서는 민족주의 정서에 기반한 임시방편적 정책들만 넘쳐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OECD(경제협력개발기구)는 38개 회원국에 시장 개방을 유지하고 이커머스 등의 수단을 활용해 재화와 서비스의 원활한 이동을 촉진하라고 제언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자간 무역 협정 체결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더욱이 앞서 WTO는 미국, 인도, 유럽연합(EU) 등 강대국들이 팬데믹 기간 코로나19 백신을 대규모로 비축하는 사태를 막지 못한 바 있다. 지난해 3월에는 인도와 인도네시아가 이커머스 거래에 관세 부과를 금지하는 25년 된 WTO 규정의 조기 종료를 관철시키기도 했다.

국제기구들마저도 국가 안보를 내세운 각국의 주장들을 조정할 수단이 부족하다는 방증이다. 실제로 WTO의 ‘국가 간 무역 장벽의 구실로 국가 안보를 내세우지 않고, 내세울 경우에는 논박하지 않는다’는 비공식 합의는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다. UN 안전보장이사회(UN Security Council)가 상임이사국의 거부권 행사로 마비되는 일도 부지기수다.

국제기구 조율 아래 다자간 호혜적 협력 필수

어쩌면 국가 간 협력을 의심과 불안으로 바라보는 시대인 만큼, 글로벌 공급망에 대한 불안은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공급망 개선과 강화는 구조조정 자체의 목표를 규명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목표가 환경 보호라면 비참한 환경 및 노동 기준 하에 원자재를 공급하는 개발도상국들은 교역 상대국이 될 수 없다. 지정학적 이슈가 중요하다면 중국에 대한 의존 심화는 바람직하지 않다. 목표가 자국 내 일자리 창출을 위한 리쇼어링이라면 각국 정부는 자국 노동자들의 직업 훈련과 기반 시설 확충에 주력해야 한다.

미국을 비롯한 몇몇 국가들은 이 모든 것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 다양하고 일부 모순적인 목표들을 아우르는 유일한 방법은 상호 협력뿐이다. 결국 세계은행(World Bank), WTO, OECD 등이 협력의 틀을 제시해야 하지만 광범위한 정책 조율은 아직 눈에 띄지 않는다. 아무리 강대국이라 해도 팬데믹을 예방하고, 기후변화에 대응하고, 지정학적 긴장을 완화하는 역할을 혼자 해낼 수는 없다. 협력 없는 공급망 재편 시도는 헛수고에 그칠 뿐이다.

원문의 저자는 키스 록웰(Keith Rockwell) 힌리치재단(Hinrich Foundation) 선임 연구원 겸 윌슨센터(Wilson Center) 국제 연구원입니다. 영어 원문 기사는 Supply chain changes need a globally coherent policy response / EAST ASIA FORUM에 게재돼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