칩스법·기술신용대출 등 첨단 산업 지원 강화한 미국, 한국은 여전히 ‘담보대출’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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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보대출 중심의 첨단 산업 지원, 기술신용대출 비중은 담보대출의 '3분의 1' 수준
1%p 우대금리에도 지원 프로그램 꺼리는 기업들, "리스크 감당할 정도의 지원 아냐"
현금 지원으로 자국 경쟁력 높인 미국, AI 칩 기술신용대출도 100억 달러 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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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 산업 육성을 위한 금융 지원에서 기술신용대출보다 담보대출이 훨씬 많이 이뤄진 것으로 나타났다. 기술력이 있어도 부동산 등 담보가 없으면 정부의 정책자금을 지원받기 어려운 상황이란 의미다. 공격적인 현금 지원으로 자국 내 산업 경쟁력을 끌어 올리고 있는 미국과 대비되는 모양새다.

첨단 산업 금융 지원, 대부분이 물적담보대출

8일 윤영석 국민의힘 의원이 산업은행, 기업은행 등으로부터 전달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1월부터 올해 4월까지 정책금융 기관들은 반도체·바이오·이차전지 등 국가 첨단 전략산업 기업에 9조6,180억원에 달하는 담보대출을 실행했다. 반면 이 기업들의 기술력을 평가해 자금을 빌려주는 기술신용대출 금액은 3조3,170억원으로 담보대출 규모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특히 반도체·바이오 분야에선 기술신용대출이 7,530억원으로 담보대출(3조8,002억원)의 5분의 1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이자율도 기술신용대출이 더 높았다. 담보대출의 경우 이자가 연 4.7~4.8% 정도였으나, 기술신용대출 이자는 연 5.1~5.4% 정도로 담보대출보다 0.3~0.7%p 높았다. 첨단 전략산업 금융 지원을 표방하고 있음에도 대출 양상이 기술력을 평가해 자금을 지원하는 기술신용대출보다 단순 부동산 담보대출에 편중돼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윤 의원은 “주요 선진국들이 주요 첨단산업에서 파격적인 세제혜택 등으로 자국 산업 경쟁력 강화를 적극 지원하는 가운데 한국은 금융지원에서도 전통적인 물적담보대출에만 치중하고 있다”며 “기술신용대출 심사 능력 강화 및 적극적인 기술신용대출의 실행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경직된 지원 방식에 기업들도 ‘선 긋기’

이처럼 정부의 자금 지원 방식이 다소 경직돼 있다 보니, 정부가 금융 지원 프로그램을 제시하면 오히려 기업이 꺼리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앞서 지난 3일 KDB산업은행은 이달부터 17조원 규모의 반도체 산업 저리 대출 프로그램을 가동하겠다고 밝혔다. 오는 2027년까지 주요 첨단산업에 550조원 이상의 설비투자를 추진 중인 정부에 발맞춰 100조원 수준의 시설자금을 부담하겠단 계획이다.

최근 자금줄이 마르기 시작한 반도체 업계 입장에서 산은의 자금 17조원 지원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실제 국내 주요 반도체 대기업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자금 공급이 시급한 상황이다. 삼성전자는 2022년 47조원, 2023년 48조원 등 연간 천문학적인 설비 투자를 쏟아붓고 있으며, 현재 평택캠퍼스에 건설 중인 반도체 생산시설 투자 금액도 200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SK하이닉스 역시 올해 설비 투자 예상액이 13조원으로 전년 대비 2배 가까이 커졌고, 공사를 시작한 청주 M15X 공장에 들어갈 자금도 20조원 이상으로 추정된다.

금리 측면에서도 이익이 크다. 산은은 대출 상대가 대기업일 경우 0.8~1%p의 우대금리를 제공하는데, 이를 적용하면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받을 수 있는 금리는 연 3.5% 수준이다. 이는 삼성전자가 지난해 삼성디스플레이를 통해 21조9,900억원을 빌리며 약정한 연 4.6%보다 훨씬 싸다. 업계 안팎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각각 5조원, 3조원가량의 대출을 검토 중”이란 소식이 거듭 전해져 오는 배경이다.

다만 기업 측에선 산은 대출에 대해 “확정된 바 없다”고 선을 그었다. 차후 사업 개편에 정부 입김이 작용할 수 있는 데다 시장에 부정적 시그널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산은은 과거 자금 지원을 계기로 기업들에게 각종 담보를 요구하거나 까다로운 부대조건을 내건 바 있다. 자금조달 계획서를 깐깐하게 요청하거나 오너 일가의 고통 분담을 요구하기도 했다. 리스크가 너무 크단 의미다. 1%p, 17조원 대출 기준 150억원가량의 금리 프리미엄을 위해 불확실성이 높은 위험 부담을 안고 갈 필요는 없다는 분위기가 확산하는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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칩스법 등 파격적인 지원 쏟아내는 미국

반면 미국은 민관이 첨단 산업에 파격적인 지원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기술신용대출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앞서 지난 5월 뉴저지 소재의 스타트업 코어위브는 AI 칩을 담보로 75억 달러(약 10조4,000억원) 규모의 사모대출을 받았다. 2022년 말 AI 열풍이 시작된 이래 AI 칩 담보대출 계약이 체결된 건 코어위브를 포함해 총 4건에 달하며, 대출 규모도 100억 달러(약 13조8,000억원)가량이다. 물론 ‘AI 칩을 담보로 잡는다’는 구조가 생소하고 검증되지 않은 탓에 대출 이자율이 연 10~15%로 높게 책정돼 있긴 하지만, 기술신용대출을 활발히 이용하려는 시장 분위기가 형성됐단 점에서 충분히 유의미하다는 것이 시장의 대체적인 시선이다.

반도체 지원법(칩스법)에 따른 정부 보조금 지원도 산업 육성의 큰 틀이 됐다. 칩스법은 반도체 기업들의 미국 내 설비투자를 장려하기 위해 반도체 생산 보조금(390억 달러)과 R&D 지원금(132억 달러) 등 5년간 총 527억 달러(약 73조원)를 지원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미국은 해당 법안을 바탕으로 자국 기업인 인텔, 마이크론과 한국 삼성전자, 대만 TSMC 등에 큰 규모의 보조금 지급을 시사했다. 직접적인 현금 지원을 통해 글로벌 반도체 업체의 자국 내 투자 경쟁을 유도한 것이다.

칩스법 시행 이후 미국의 반도체 산업 전망은 부쩍 밝아졌다. 미국 반도체 산업 협회(SIA)에 따르면, 칩스법 등 정부 차원의 자금 지원 프로그램이 없었다면 미국의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현재 10%에서 8%로 줄어들 전망이었다. 그러나 칩스법이 시행되면서 미국의 반도체 제조 능력이 2032년까지 현재의 3배까지 늘어날 것이란 추정이 나왔고, 이에 따라 미국의 반도체 시장 점유율도 14%로 높아질 것으로 전망됐다. 정부의 적극적인 투자가 빛을 발하고 있는 셈이다.

미국 입장에서 특히 호재인 건, 대선 이후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실권을 잡는다 하더라도 칩스법은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칩스법은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주의)’에 걸맞은 정책 중 하나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정책 기조와 맞아떨어진단 의미다. 더군다나 트럼프 전 대통령은 바이든 대통령보다 자국 우선주의 정책을 더 강조하고 있기에, 향후 트럼프 전 대통령이 인텔이나 마이크론 등 미국 반도체 기업에 보조금을 몰아줄 수 있단 관측도 나온다. 현재로선 한국 기업이 반도체 패권을 쥐고 있지만, 한국 정부의 소극적인 지원 정책이 이어질수록 미국의 공세에 밀릴 수밖에 없을 것이란 위기의식이 업계를 중심으로 퍼져 나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