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의 ‘연구비 카르텔’ 언급에 반발하는 과학계, 자성의 목소리는 어디로?

국제학술지도 비판하는 韓 R&D 예산 삭감? “사실상 과학계의 전략” 과학계 ‘악습’ 걷어내야 할 때, “낡은 R&D 비효율 타파할 것” 현장 연구자들 사이서 불만 쏟아지지만, “결국 누군가는 해야 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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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R&D 예산 삭감과 관련한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의 기사/사진=사이언스 홈페이지

세계 3대 국제학술지 사이언스(Science)가 연구개발(R&D) 분야에서 ‘약탈적 이권 카르텔에 맞서 싸우라’는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이 한국 연구계에 충격을 줬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사실상 외신을 이용해 정부를 압박하려는 과학계의 전략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는 가운데, 과학계가 현장에 만연한 지원금 나눠먹기를 여전히 자성하지 않고 있다는 비판도 쏟아진다.

사이언스 “韓 R&D 예산 삭감, 尹 언급 ‘충격적'”

사이언스는 19일(현지 시각) ‘과학 지출 챔피언 한국, 예산 삭감 제안’이라는 제목의 논평을 통해 국내 소식을 이같이 소개했다. 특히 급격한 R&D 예산 삭감으로 기초연구 지출이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를 집중 조명했다. 사이언스는 “한국의 많은 연구자들은 주요 예산 내용이 불투명하고 윤석열 정부가 연구자들과 협의하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며 “윤석열 대통령이 행정부 장관들에게 ‘약탈적 이권 카르텔’과 대담하게 맞서라고 촉구한 문구는 많은 연구자들에게 충격을 줬다”고 전했다.

김소영 KAIST(한국과학기술원)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는 이와 관련 사이언스에 “많은 연구자들이 이 문구에 충격을 받았다”며 “모두 자신이 카르텔의 일원인지 궁금해했다”고 밝혔다. 이어 “연구그룹이 카르텔인지 아닌지는 상당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덧붙였다. 사이언스는 “한국은 과학 자금을 지출하는 데 떠오르는 스타였다”며 “한국은 지난해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투자 비율이 4.9%로 미국(2.6%)보다 높았다”고 설명했다. 실제 한국은 지난해 정부와 민간기업 R&D 예산이 100조원을 돌파했는데, 이는 이스라엘(5.9%)에 이어 GDP 대비 R&D 투자 비율이 가장 높은 수치다.

그러나 정부 예산으로 지원하는 내년도 국가 R&D 예산은 대폭 삭감됐다. 앞서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지난달 29일 내년도 R&D 예산을 올해 대비 16.6%(5조2,000억원) 삭감한 25조9,000억원으로 편성한 바 있다. 특히 미래 기초연구 예산은 6%(1,537억원)줄었다. 사이언스는 한국 연구진이 기초연구, 젊은연구자 지원이 줄어들어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를 보도했다. 또 내년도 예산 삭감분은 미국 보건첨단연구계획국(ARPA-H)을 벤치마킹한 고위험 바이오 연구, 미국 보스턴을 모방한 바이오 혁신 생태계 조성 등으로 돌린 부분도 소개했다.

연구비 나눠먹기 관행 끊어내야, 과학계 자성 필요해

윤 대통령이 ‘약탈적 이권 카르텔에 맞서 싸우라’고 언급한 건 인맥에 따른 연구비 나눠먹기, 과제 규모를 줄여 건수를 늘리는 과제 쪼개기 등 과학계 현장에 만연한 비리를 타파하고 연구기관 경쟁력을 제고하겠단 취지였다. 이와 관련해 문길주 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원장은 “과학기술계는 초등학교가 아니다”라며 “과학기술계가 직면한 상황을 냉정하게 보고, 잘하는 연구자에게 연구비가 몰리도록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연구원 간 나눠먹기식이 아닌 실력에 따라 연구비가 나눠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우리나라의 국가 R&D 예산은 지난 2018년 약 19조7,000억원에서 올해 30조7,000억원까지 급격히 늘어났으나, 현장에선 양적 증가에도 불구하고 효율성이 매우 낮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연구비 나눠먹기, 과제 쪼개기식의 예산 배분 관행이 만연해 있음을 과학계 현장 스스로가 방증한 꼴이다. 특히 현장에선 “특정 인맥의 연구자들이 연구 과제를 독점하거나 상용화로 이어지지 않는 ‘연구를 위한 연구’를 자행하는 일이 넘쳐나고 있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게다가 부처 간 칸막이로 인한 중복 투자도 판을 치고 있고, 국가 R&D로 명맥을 유지하는 소위 ‘좀비 기업’들도 여전한 상황이다. 국가 R&D 과제 성공률이 98%에 달하지만 세계적인 혁신 연구가 나오지 못하는 것도 이런 적당주의 연구 풍토와 무관치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윤 대통령은 양자 컴퓨팅, 우주·항공, 인공지능 등 핵심 전략기술에 대한 집중 투자와 국제 공동연구를 강조해 왔는데, 지금의 나눠먹기식 잘못된 관행하에서는 실현이 불가능하다. 한국 과학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국가 R&D 시스템은 대수술이 불가피한 이유다. 과학계 이권 카르텔을 뿌리 뽑고 미래·원천 기술 연구에 집중할 수 있도록 개선해야 한다. 이종호 과기부 장관은 지난달 정부서울청사에서 ‘2024년도 국가연구개발사업 예산 배분·조정안’ 브리핑을 열고 “낡은 R&D의 관행과 비효율을 걷어내고 퍼스트무브로 혁신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정부의 R&D 예산 삭감이 지닌 궁극적인 목표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지난 8월 22일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2024년 주요 R&D 예산을 설명하고 있다/사진=과학기술정보통신부

‘선택과 집중’에 불만 쏟아내는 현장 연구자들

다만 공공 부문 연구자들은 정부의 R&D 예산 ‘선택과 집중’ 배정에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 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과기노조)은 지난달 성명서를 발표하고 “정부의 R&D 예산 삭감은 정부출연연구기관을 비롯한 공공 부문 연구기관을 상시적 구조조정 상태로 몰아넣고 연구 인력을 내쫓아 고사시키겠다는 선언”이라며 비판을 쏟아냈다. 이어 “R&D를 둘러싼 카르텔이 있다면 부처 이기주의와 권력 유지에 급급한 정부 관료, 전문성 없는 정치권과 일부 관변 과학기술자라는 것을 명심하라”며 “진정 R&D 제도 혁신을 이루려면 정부 관료 중심의 상명하달식 정책이 아니라 연구 현장 종사자의 의견과 목소리를 반영한 정책과 제도를 수립하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정부가 12대 국가전략기술과 글로벌 연구, 미래 세대 육성을 위한 젊은 과학자 지원 금액을 증액했다는 데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정부는 젊은 과학자를 위한 직접적인 지원 규모가 2024년 7,581억원으로 전년 대비 42% 증가했다고 강조했지만, 과학계는 “국회에 제출한 ‘2024년도 예산안 및 기금운용계획안 사업설명자료’에 따르면 유사 사업 예산은 오히려 삭감됐다”고 지적했다. 실제 국회 자료를 보면 신진연구자의 연구 기회를 확대하고 조기 연구 정착을 유도하는 생애 첫 연구 사업은 48.6% 삭감된 131억2,300만원, 개인기초연구 지원 예산인 기본연구는 66.3% 감소한 765억5,700만원이 배정되는 등 유사한 성격의 기존 사업 비용이 상당히 삭감된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기관 예산이 어디서 얼마만큼 삭감됐는지 명확하지 않아 대혼란 상태가 야기됐다고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다. 특히 정부가 개별 연구사업들의 목표와 성과 등을 꼼꼼히 따질 겨를 없이 삭감 총량 목표부터 세워놓고 접근했다는 점에서 연구자들의 반발이 크다. 기획재정부는 지난해 내놓은 2022~2026년 국가재정운용계획에서 “미래 사회 대응과 신산업 육성을 위한 R&D 투자를 확대한다”고 밝히며 ‘2024년 R&D 예산’을 올해 본예산에 견줘 약 8천억원 더 편성한다는 계획을 제시한 터였다. 이 기조는 올해 3월 확정된 ‘예산안 편성 지침’에도 유지됐다. 그러다 부처별 예산 요구안이 기재부에 넘어가 심사가 한창이던 지난 6월 말, 윤 대통령이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나눠먹기식 R&D 예산 원점 재검토’를 주문한 뒤 분위기가 급반전됐다. 기재부가 예산을 각 부처로 돌려보내며 R&D 예산의 30%를 삭감 목표로 제시했다는 증언이 쏟아진다. 사실상 예산 감축이 고작 두 달 만에 졸속 진행됐다는 뜻이다.

그러나 일각에선 연구기관 차원의 자성도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실제 21일 퇴직자를 챙겨주기 위해 일감을 몰아주는 등 정부 출연금을 방만하게 사용해온 공공기관들이 감사원 감사에서 무더기로 적발된 바 있다. 감사원에 따르면 환경공단은 2012년부터 퇴직자들 설립 업체와 폐비닐처리시설 위탁운영 계약을 체결하면서 계약조건에 ‘공단 퇴직자 고용승계 보장’, ‘고용승계에 따른 인건비는 용역원가에 반영’ 등의 내용을 적시했다. 이후 공단 퇴직자의 보수 수준을 계약 예규보다 1.9배 높게 책정해 2022년까지 노무비를 70억 원가량 과다 지급했다. 산업인력공단은 2018년부터 2022년 8월까지 재직 직원의 가족 373명을 시험위원으로 위촉·활용하고, 수당으로 총 40억여 원을 지급한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직원들의 미성년 자녀 10명도 관리원 등으로 위촉돼 수당을 지급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신용보증기금은 자사 퇴자 70여 명을 채용하는 조건으로 특정 회사에 10년간 237억원의 일감을 몰아준 것으로 드러났다. 원자력의학원은 지난해 본부장직급을 특별채용하면서 응시자 연령 조건을 ‘만 60세 이상’으로 임의 변경한 후 퇴직자를 재채용했다.

이렇다 보니 시민들 사이에선 ‘나라에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도둑이 너무 많다’는 곡소리가 터져 나오기도 한다. 물론 정부의 R&D 예산 삭감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이 어렵사리 도달한 선진국의 지위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선 과학기술에서 ‘선도자’로의 전환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제 여기저기 구멍 난 R&D 예산 그릇을 탄탄하게 손봐야 할 때다. 그릇이 구멍 난 채라면 아무리 많은 물을 쏟아부어도 다 새어나가기 마련이다. 그릇을 고치기 위해 잠시 물이 끊어지더라도 미래를 생각하면 한 번은 겪어야 하는 어려움이다. 과학계의 자성적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